대웅전
대웅전

 

[아츠앤컬쳐] 남도의 화순 쌍봉사는 천불천탑과 와불의 전설을 간직한 운주사에 못지않은 진귀한 문화유산이 가득하다. 보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 이 귀한 보물들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승탑
승탑

쌍봉사는 옛 석공의 놀라운 솜씨와 깊은 불심을 엿볼 수 있는 철감선사의 승탑과 비문 그리고 우리나라의 목탑의 원형인 대웅전까지 소박하지만 아름답고 작지만 묵직한 기품이 느껴지는 천년 고찰이다. 깊은 산속 여느 절집과 달리 산 아래 평지에 유서 깊은 쌍봉사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신라 문성왕 시절에 중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철감선사가 이곳에 아름다운 산세에 이끌려 절을 짓고 자신의 호를 따라 쌍봉사라 했다는 속설과 그 이전부터 쌍봉사가 존재했다는 기록이다. 곡성 봉두산 태안사(1366년 혜철스님이 세움) 입구 부도밭에 혜철스님의 사리가 담긴 승탑과 탑비가 있는데 그 탑비에 쌍봉사의 창건 시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록들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대웅전
대웅전

쌍봉사의 건물형태나 가람배치는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았다. 움직이는 배의 형상을 하고 있는 지형에 맞게 돛대 역할을 해줄 길쭉한 목탑을 세우고 경내에는 우물도 파지 않았으며, 돛대 역할을 하는 쌍봉사 대웅전은 독특한 삼국시대의 목탑 형식이다. 높이 12m에 3층짜리 전각으로 전체적인 모습이나 비례감이 일반 석탑과 많이 닮아있다. 탑의 몸돌에 해당하는 각층의 벽면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으로 되어있고 가장 윗부분인 삼층 지붕은 마치 석탑처럼 4면의 기왓골이 꼭대기에 모이는 사모지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 목탑의 원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서 일찍 보물로 지정되어 보존되어왔다.

금불상
금불상

그런데 옛 사진 속의 대웅전과 지금의 대웅전은 조금 다른 모습이다. 그 이유는 수백 년을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보존해오던 문화재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다행히 당시 건물 안에 있던 엄청난 무게의 3기의 목조불상은 화재 당시 마을의 한 농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씩 등에 업고 나와 화를 면했다.

시왕상과 권속들
시왕상과 권속들

또한 대웅전 뒤편에 진귀한 보물인 지장보살을 비롯해 21기의 불상들이 빼곡히 들어앉은 지장전이 있다. 대부분의 진흙으로 만드는 불상과 달리 지장전 불상들은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특히 지장보살 좌우의 시왕상은 조선후기 목조각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불상들은 1667년에 조각승 운혜스님이 스물네 분을 조성했으나 지금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도귀왕 그리고 각 시왕상과 권속들로 스물한 분만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 좌우 도명존자 무도귀왕
지장보살 좌우 도명존자 무도귀왕

목재는 인도에서, 도료는 중국에서 가져와 만들었다는 지장전의 시왕상은 자연스러운 인체의 모습과 부드럽고 유연한 곡선의 흐름, 얼굴 표정과 손동작, 옷의 매무새까지 섬세한 표현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옷에 그려진 무늬는 색은 바랬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호성전
호성전

쌍봉사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전각 중 호성전은 T자형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일무이한 전각으로 철감선사와 조주선사의 영정이 나란히 봉안되어 있다. 당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철감선사가 남전보원의 제자가 되었을 때 동문수학을 한 이가 바로 조주선사다. 차와 선이 같다는 조주의 “다선일미사상”이 철감선사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고, 그 다선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훗날 초의선사도 이곳에 머물며 선을 닦았는데 그가 즐겨 거닐던 대숲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쌍봉사에 숨겨진 귀한 보물로, 우리나라 전 시대에 걸쳐 손꼽히는 철감선사의 승탑(보물170호)과 탑비가 나온다.

탑비
탑비

2.3m에 달하는 전체적인 모습도 훌륭하지만 세부조각의 섬세함은 가히 독보적이다. 지붕의 기왓골 끝에는 동전만 한 수막새 속에 일일이 연꽃을 새겨 넣었다. 우리나라 석조미술품 중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다. 이 승탑은 막돌로 깎았음에도 전반적인 비례나 균형의 미와 정교함에 아름다운 완성미를 갖고 있어서 건축사적 의미도 크다. 승탑 옆의 탑비는 현재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있다. 용머리에 여의주를 문 채 엎드려 있는 거북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일 듯 생생하다.

목조상
목조상

천년이 넘는 긴 세월 흥망성쇠를 거듭한 쌍봉사 세종 31년에 편찬해 1451년에 완성된 고려시대의 역사서 <고려사>에는 최씨 무신정권의 3대 집정이었던 최항이 송광사의 2대 사주인 진각국사의 제자가 되어 당시 쌍봉사에 머무르면서 세도를 부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조의 세손 시절 스승인 김종수가 1786년에 비문을 짓고 황원조가 글씨를 쓴 쌍봉사 사적비도 이곳에 있다. 이 비문을 살펴보면 신라말에 쇠퇴하기 시작한 쌍봉사를 고려시대의 혜초국사가 고쳐 지었고 조선 세조 때는 전라도 관찰사 김방이 중창했다고 적혀있다.

대숲길
대숲길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쌍봉사는 왕실사찰로서 그 당시 쌍봉사 전각, 누각, 승각, 암자를 합쳐 400여 칸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되고 1690년에 중창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법맥을 꿋꿋이 지켜와 한국전쟁 때도 살아남았던 화순 쌍봉사가 사소한 실수로 인하여 소중하고 귀한 문화재를 잃고 말았다. 한번 훼손된 문화재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쌍봉사 대웅전이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교훈이다.

 

글 | 김달중
현)한국예총 강진지회 사무국장, 국립목포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동신대 문화기획과 졸업
kdj0504@hanmail.net

저작권자 © Arts & Cultur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