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19세기 오페라는 오늘날의 영화나 드라마처럼 대중적인 예술 장르 중의 하나였다. 초창기의 오페라에는 크리스토프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이탈리아어: Orfeo ed Euridice)》와 같이 신화나 먼 옛날얘기를 다루는 환상적인 소재가 등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왕궁을 무대로 하는 베르디(Giuseppe Verdi)의 《아이다(Aida)》, 《오텔로(Otello)》 등 당시 낭만주의 오페라에는 우아하고 고급스런 의상과 화려한 무대가 즐비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나타난 베리스모(verismo) 오페라는 달랐다.
베리스모에는 진실주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베리스모 오페라는 실증주의 철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Emile Zola) 등이 전개한 자연주의 운동을 이탈리아식으로 수용한 것이다. 치정과 살인, 배신과 음모 그리고 가난으로 점철된 서민의 밑바닥 인생을 실감 나게 그려낸 작품들이다. 지금까지 오페라 무대 위에서 아름답게 포장되어 숨겨졌던 인간의 어두웠던 삶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낭만주의 오페라가 신화나 영웅담과 같은 비현실적 테마를 즐겨 취급한 데 비해, 베리스모 오페라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이 지닌 추악하거나 잔인한 모습 등이 솔직하게 표현된다. 베리스모 오페라의 대표작은 루쩨로 레온카발로(Ruggero Leoncavallo, 1857~1919)의 《팔리아치(Pagliacci, 1892)》이다.
루쩨로 레온카발로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그는 나폴리에서 태어나, 그곳의 산 피에트로(San Pietro)의 마젤라 음악원에서 공부하였다. 몇 년간 교사 생활을 한 후, 여러 개의 오페라 작품을 썼지만 명성을 얻지는 못하던 무명작가였다. 그러던 중 레온카발로는 1890년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이탈리아어:Cavalleria rusticana)》(베리스모 오페라 형식)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에 고무되어, 팔리아치를 작곡하였다.
팔리아치는 이탈리아어로 ‘광대들’이라는 뜻이다. 막이 오르기 전 토니오(극 중 꼽추 광대)가 무대 밖에 나와서 관객들에게 작품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한다. 토니오는 이 공연은 옛날부터 전해지는 가면극과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든 극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면서 관객들이 볼 때는 광대의 눈물이 그저 연기일 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작가는 관객에게 인생의 한 단면을 보여 주기 위해 실제 있었던 일을 각색해 무대에 올리는 것이고,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도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피와 살로 이루어진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는 내용의 아리아를 부른다.
줄거리는 한 유랑 극단의 광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치정극이다. 마을에 공연하러 온 유랑극단 단장의 아내가 다른 사내와 눈이 맞고 이에 격분한 단장은 감정을 억누르며 무대에 올랐다가(1막) 실제 상황과 똑같이 전개되는 극에 이성을 잃고 관객들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부인과 그 애인을 죽인다(2막)는 이야기이다(액자식 구성). 그런데 사실 레온카발로 본인이 어린 시절에 실제 법원 방청석에서, 부정한 아내를 죽인 어릿광대가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수감된 것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실제 작품에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 실제 레온카발로가 봤던 어릿광대가 팔리아치라는 작품을 보고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모델로 한 영화가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주장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있다. 대법원은 영화가 허위의 사실을 적시한 것이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서 그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에는 행위자(영화 제작사나 감독)가 적시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었고, 또 그렇게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그 행위자에게 불법행위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적시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적시된 사실의 내용, 진실이라고 믿게 된 근거나 자료의 확실성, 표현 방법, 피해자의 피해 정도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적시된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 경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차 망인이나 그 유족의 명예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탐구 또는 표현의 자유가 보호되어야 하며, 또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 용이하지 아니한 점 등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영리적 목적 하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제작되는 상업영화의 경우에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더라도 영화제작진이 상업적 흥행이나 관객의 감동 고양을 위하여 역사적 사실을 다소간 각색하는 것은 의도적인 악의의 표출에 이르지 않는 한 상업영화의 본질적 영역으로 용인될 수 있으며, 또한 상업영화를 접하는 일반관객으로서도 영화의 모든 내용이 실제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극적 허구 사이의 긴장관계를 인식·유지하면서 영화를 관람할 것인 점도 그 판단에 참작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영화의 내용이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지의 여부는 당해 영화의 객관적인 내용과 아울러 일반의 관객이 보통의 주의로 영화를 접하는 방법을 전제로, 영화 내용의 전체적인 흐름, 이야기와 화면의 구성 방식, 사용된 대사의 통상적인 의미와 그 연결 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그 영화 내용이 관객에게 주는 전체적인 인상도 그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고, 여기에다가 당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보다 넓은 주제나 배경이 되는 사회적 흐름 등도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는 판단이다.
참고로 상업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를 홍보하거나 광고하는 행위가 항상 필요하다. 오페라나 영화의 경우에도 포스터 그 자체가 제작될 것이다. 이때 실제 인물이 그오페라나 영화가 아닌 포스터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때도 법원은 상업영화의 경우에는 대중적 관심을 이끌어 내고 이를 확산하기 위하여 통상적으로 광고·홍보행위가 수반되는바, 영화가 허위의 사실을 표현하여 개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도 행위자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었고 또 그렇게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 그 행위자에게 명예훼손으로 인한 불법행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그 광고·홍보의 내용이 영화에서 묘사된 허위의 사실을 넘어서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광고·홍보행위가 별도로 명예훼손의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도 볼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대법원 2010. 7.15. 선고 2007다3483 판결).
글 | 이재훈
문화 칼럼니스트, 변호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부연구위원, 로보어드바이저 스타트업 ‘파운트’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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