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3일(수) ~ 2020년 9월 27일(일) / 마이아트뮤지엄
" 내가 아이에게 그리는 눈은 나 자신의 가장 깊은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눈은 영혼의 창이다. "
" The eyes I draw on my children are an expression of my own deepest fellings.
Eyes are windows of the soul."
도심 속 대형 미술 전시공간 마이아트뮤지엄은 큰 눈의 어린아이 그림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미국의 여성화가 마가렛 킨(Margaret Keane, 1927~)의 아시아 최초 회고전을 개최한다. 2014년 동명의 제목으로 개봉한 팀 버튼의 영화로 국내에 잘 알려진 ‘빅 아이즈’ 시리즈를 비롯하여, 모딜리아니를 연상케 하는 긴 얼굴의 여인 등 다양한 화풍의 원작 130여 점을 전시한다.
작품들은 샌프란시스코의 킨 아이즈 갤러리를 비롯하여 여러 개안 소장 작품들을 엄선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의 작품들을 망라하여 그녀의 삶의 변화에 따라 5부로 구성하였으며, 60년대 킨 열풍을 보도한 <라이프> 잡지의 다큐 사진과 팀 버튼의 영화 자료 등을 함께 구성하여 더욱 입체적인 전시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를 통해 시대의 장벽을 허문 여성화가로서의 그녀의 삶과 작품을 총제적으로 조명하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는 60년대 남편의 그늘아래 숨겨진 화가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낸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의 변화를 따라 내러티브하게 구성될 예정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과정으로 경제의 중심축이 움직이고, 대중문화가 확산되었다. 이 때 특정 계층만 누리고 있던 고급 예술을 벗어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구입할 수 있는 ‘키치’예술이 등장하게 된다. 비평가들은 킨의 그림을 키치의 일종으로 “지나치게 감정적”, “싸구려”, “천박하다”는 등으로 평가했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부흥과 함께 급부상한 중산층의 문화적 욕망과 남편 월터의 미술품 판매 수완 덕분에 킨의 그림은 널리 알려졌다. 영화감독 팀 버튼은 자신이 자란 동네에서 어디에서나 마가렛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킨의 복제된 포스터들은 미국을 뒤덮었다.
그러나 월터는 당시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여성 작가를 드러내는 것이 판매에 불리할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작가로 소개하였다. 마가렛이 '빅 아이즈'로 표현한 감정과 느낌이 너무나 개인적이고 암묵적이어서, 월터는 그림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명세를 타고 작품의 가격이 상승하자 그는 각종 티비쇼 등에 출연하여 “빅 아이즈는 2차 세계 대전 후 전쟁으로 피폐해진 도시에서 절망에 빠진 아이들을 떠올 리며 그렸다”는 거짓 내러티브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중에서야 어디서 영감을 받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처럼 슬픈 눈을 그렸던 것은, 내가 그림 속 아이들처럼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마가렛은 자신의 예술을 대변하기를 포기했고 월터가 대신 자신의 생각 으로 작품을 설명했기 때문에 표현과 예술 사이에 단절이 생겼으며, 이 단절이 킨의 작품을 ‘키치’라고 불리게 된 이유중 하나이다.
월터가 빅 아이즈를 자신의 이름으로 내세우자, 1960년 초반부터 마가렛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그림을 그려간다. 모딜리아니의 화풍을 좋아했던 마가렛은 세로로 좁고 긴얼굴의 여인상을 그렸다. 이때부터 자신의 싸인인 ‘KEANE’에 그녀의 처녀적 이름인 ‘Margaret Dorris Howkins’의 약자를 추가 하여 ‘MDH Keane’으로 서명하기 시작한다. 당시 빅 아이즈는 월터의 그림으로, 긴 얼굴의 여인상은 마가렛의 그림으로 알려졌으며, 마케팅 기회를 놓칠 리 없었던 월터는 ‘그림을 그리는 킨 부부’ 로 홍보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모딜리아니에 영향을 받은 것은 감정적으 로도 필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모딜리아니가 꿈꾸는 아름다움의 정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우수와 같은 것이며, 그로 부터 솟아오르는 꿈과 생명의 신비로운 위안이었기 때문이다. 그외에도 보티첼리, 피카소 등에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적이면서 왜곡된 인물 화풍을 그렸다.
빅 아이즈가 주로 어린 아이들과 동물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면, 긴 얼굴의 여인들은 주로 성숙한 여인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기품 있는 방식으로 가늘게 표현되어 보다 섬세하고 세심한 느낌을 준다. 얼굴은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는 듯이 왠지 모를 슬픔을 담은 그윽한 표정에, 목은 줄기처럼 우아하게 뻗어 나와있다. 자신의 내면을 반영하듯 앞선 여인의 뒤로 그림 자처럼 고개를 숙인 또 다른 자아가 이중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작가가가 느꼈던 이런 고독감은 작품 속 인물의 얼굴을 통해 묘사되 었고, 바로 이점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가렛은 자신의 작품이 가장 사랑받았던 때에 집안에 갇힌 고스트 화가로 지내며 가장 불행했다. “8년간의 악몽이 었다.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몰랐고 거짓말은 점점 커져 이어나 가야만 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고 다혈질이 되어가는 남편과 자신과 아이들까지 속이고 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 마가렛은 드디어 용기를 내어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낸다. 그리고 1965년 이혼을 하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킨 열풍은 1965년에 최고조를 찍은 후 빠르게 식었다. 빅 아이즈를 모방한 그림들이 쏟아져나오고, 이러한 경쟁은 킨의 수입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하와이로 이주한 후에도 월터에게 이혼을 전제로 약속한 그림 30여 점을 계속 그에게 그려주다가, 1970년 용기를 내어 라디오를 통해 자신이 진짜 작가임을 밝히게 된다. 이때쯤 미국에서는 여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페미니즘 미술이 성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지난한 법정 다툼을 끝에 1986 년 법정에서 판사와 배심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특유의 커다란 눈의 소년을 그려냄으로써 자신이 “빅 아이즈”의 진정한 작가임을 인정 받게 된다. 마가렛은 “나는 돈을 원하지 않았고, 단지 법적인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약 30년동안 남편의 뒤에 숨어야 했던 마가렛은 이후로 KEANE 서명의 그림들의 원작자로서 이름을 되찾았다. 마거릿은 소송에서 이겼고 비로소 자신의 그림에 직접 서명할 수 있었다.
현재 90세가 넘은 마가렛 킨은 여전히 매일 예술작업을 하고 있고,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며 새로움을 시도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모습을 통해 그녀의 예술성이 살아 숨쉬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저는 현재 페인팅 보다는 드로잉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라고 덧붙인다. 요즘 그녀의 작품은 아크릴과 수채화를 섞은 혼합매체이다.
60년대 미국전역을 휩쓴 빅 아이즈의 영향력은 당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팀 버튼, 요시토모 나라, 마크 라이든, 맵 그래이브스 등 다방면의 현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만화 ‘파워퍼프 걸’, 인형 브라이스 돌 등 큰 눈의 어린아이들 캐릭터는 그녀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영화감독 팀 버튼은 자신의 작품 속 캐릭터를 제작하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던 마가렛 킨의 삶을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하여 2014년 영화로 제작하 였다. 평소 마가렛 킨의 작품을 좋아하여 수집해오던 팀 버튼이 드라마틱한 그녀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자고 먼저 그녀에게 제안 했다고 한다. 영화가 개봉되고 난 후 그녀의 예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나타났고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킨의 아이들은 그큰 눈으로 지금까지도 사람을 사로잡고, 사고를 전복시키고 영감을 주는 힘을 가진다.
킨은 1950~60년대 소위 주류예술이었던 추상미술에서 벗어나 갤러리와 비평가들에게는 저급한 키치 예술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으나,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1960년대 서구에서 가장 사랑받은 그림이 되었다. 그녀는 대상을 그저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어린아이의 커다란 눈에 담아내었다. 그리고 특정계층만이 누리고 있던 고급예술을 벗어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소유할 수 있도록 포스터나 엽서 형태의 복제품을 판매하여 대중미술의 상업화에 혁신을 일으켰다.
당시 보수적인 미국사회에서 여성작가로서 이름을 내세우지 못하고, 자신의 그림을 남편의 이름으로 팔아야 했던 킨은 20년이 지난 후에야 작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1960년대 미국 사회와 여권 신장 그리고 대중적인 키치 문화의 확산 등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작가가 되었다.
시간 : 화~금 오전 10시 ~ 오후 8시 (입장마감 오후 7시)
티켓 : 성인 1만5천 원, 청소년 1만2천 원, 어린이 1만 원
문의 : 마이아트뮤지엄 02-567-8878
취재기자 송준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