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미술작품은 상징의 보고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폰태너는 “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가장 감동적이고 의미로운 상징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했다. 상징이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추상적인 사물이나 개념 따위를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일 또는 그 대상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시각을 통해 방대한 양의 정보를 습득하고 지식을 교환해온 우리 인간에게 미술은 처음부터 중요한 상징의 마당이자 배움터였다. 그런 까닭에 미술 감상에 있어 보편적인 상징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은, 비록 그것이 미술 감상의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여러 가지 깨달음과 즐거움을 주는 일임에 틀림없다.
먼저 상징이 갖는 근원적인 힘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17세기 화가 푸생의 그림 <황금 소 경배>(1634)에서 이와 관련한 많은 시사를 받을 수 있다.
그림은 성경 출애굽기 32장 1~24절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지도자 모세가 시나이 산으로 간 사이에 불안해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형 아론에게 그들을 이끌어 줄 신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아론은 백성들의 금붙이를 모아서 수송아지를 만들고 이를 신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 사실을 안 모세는 분에 못 이겨 시나이 산을 내려오던 중 신이 그에게 준 석판을 산 아래로 내던져 무참히 깨뜨려 버렸다.
이 이야기에 기초해 푸생은 제사를 지낸 뒤 흥청거리며 뛰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렸다. 이들을 지휘하듯 서 있는 오른쪽 흰옷 입은 이가 바로 아론이다. 황금으로 만든 수송아지 상은 높은 대좌 위에 놓여 있다. 그림 왼편에 여호수아와 함께 시나이 산을 내려오는 모세가 보인다. 화가 나 석판을 던지고 있다.
상징의 힘과 관련해 이 그림에서 주목해 볼 부분은 바로 황금 수송아지 상이다. 소는 여러 원시적 종교에서 중요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무엇보다 그 힘과 생산력이 소를 신성한 존재로 바라보게 했다. 지금 수송아지는 힘과 생산력, 그리고 거기에 기초한 신성을 상징하는 존재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우뚝 서 있다. 소가 이처럼 야훼 신을 대신하게 된 것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 가 있어 오랫동안 부재 상태에 있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적인 지도자’의 부재는 백성들에게 신의 부재로 비쳤고, 이는 곧 새로운 신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다. 백성들의 요구를 물리칠 수 없었던 아론은 황금 수송아지로 신을 상징하게 했는데, 그 상징은 단순한 상징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신이 되는 우상화의 길을 열었다. ‘상징의 절대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의 상징을 시각적으로 체험하는 일은 이처럼 때로 우상화에까지 이르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시각적 상징의 호소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특히 옛날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자연에 반응했던 까닭에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만물이 모두 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상징을 통해 그 의식에 말을 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런 범 자연적 의식뿐 아니라 정의, 진리, 지혜, 용기, 사랑 등의 가치에 반응하고 말을 걸기 위해 인간은 수많은 시각적, 혹은 조형적 상징을 만들고 발달시켰다.
서양문명은 다른 오래된 문명과 마찬가지로 그 전통에 의지해 상징성이 풍부한 미술을 발달시켰다. 물론 과학과 개인주의의 발달로 시간이 흐를수록 과거의 상징에 담긴 복잡한 사유가 ‘비합리적이다’ 혹은 ‘비과학적이다’는 비판 아래 단순화되거나 심지어는 폐기되는 일이 생겨났고, 미술 자체가 상징보다는 현실을, 혹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역사적 상징보다는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반영하는 개인적 상징을 더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상징이 서양미술에 가져다준 축복은 크고도 광범위했다. 인상적인 몇몇 작품들을 통해 서양미술 속에서 상징이 전해주는 재미와 특징을 살펴보자.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는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브론치노가 그린 그림이다. 아리따운 누드의 여인과 앳돼 보이는 소년이 매우 관능적인 포즈로 사랑을 나누고 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다. 이 두 사람은 누구일까? 여인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이며, 소년은 사랑의 신 에로스이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여인이 왼손에 황금사과를 들고 있고 소년은 날개를 단데다가 화살통을 차고 있기 때문이다. 화살통 속에 있던 화살 하나가 여인의 오른손에 들려 있다.
주지하듯 사랑의 활과 화살은 대표적인 에로스의 상징이다. 사과는 아프로디테가 파리스의 심판 때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선정되어 파리스에게서 받은 선물이다. 그 이야기에 기대 사과는 이 그림에서 아프로디테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프로디테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 있는 것 역시 ‘미의 여왕’으로서 그녀의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밖에도 그녀가 아프로디테라는 사실은 맨 왼쪽 구석의 비둘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비둘기는 아프로디테의 신조(神鳥)이다. 서로 사랑을 나누는 한 쌍의 비둘기가 그려졌다는 것, 그 상징으로부터 우리는 아프로디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이 그림이 사랑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아프로디테와 에로스 다음으로 눈에 띄는 존재는 화면 오른쪽의 웃는 아이다. 그 아이는 아프로디테에게 장미꽃을 던지려 하는데, 아이의 오른쪽 발은 가시에 찔려 있다. 어리석음의 상징이다. 아이 뒤에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파충류의 몸통을 갖고 있는 변덕이 있다.
맨 왼쪽에서 머리를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는 질투, 혹은 미움의 상징이다. 비너스의 발 언저리에 놓여 있는 가면은 기만, 불성실을 의미한다. 자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를 둘러싸고 이런 부정적인 상징들이 놓여 있는 데서 우리는 에로스적 사랑이 불러올 재난이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이런 사랑의 불장난으로 인한 고통은 저절로 다 사라지지 않을까? 그 염원을 반영하듯 뒤통수가 깨진 여인이 푸른 천으로 이 모든 것을 덮으려 한다. 그녀는 망각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를 막는 기운 센 노인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그의 어깨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가 그가 ‘아버지 시간’임을 가리킨다. 이 같은 상징들로 미뤄볼 때 이 그림은 ‘맹목적인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그 어리석음을 드러내놓기 마련’이라는 교훈을 담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표현한 미술적 상징들이 사랑과 욕망, 지혜, 용기, 영웅심, 도전 등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적 추구와 갈등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면, 기독교 미술의 상징들은 경배의 대상을 표현하거나 그 대상을 설명하는 수단, 혹은 신과 인간, 우주의 관계를 드러내거나 구원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많이 그려졌다. 그런 까닭에 이런 상징들은 특히 글을 모르던 옛 대중에게 성서 이야기와 신앙의 전통, 경험, 그리고 그 신비 등을 가르치는 중요한 통로가 됐다.
성모자상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상과 더불어 기독교 미술에서 가장 선호된 주제다. 한스 발둥 그린(1484/85~1545)의 <앵무새와 함께 있는 성모자> (1525 혹은 1527)는 무척이나 귀엽고 아름다운 아이와 그 행복의 원천인 어머니를 그린 그림이다.
성모는 온화하면서도 정숙한 표정으로 관자를 바라보고 있다. 아기 예수는 그 어머니의 젖을 물고 역시 관자를 바라보고 있다. 젖을 먹는 아기 예수의 모습은 성모자 주제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주제로 꼽힌다.
3세기 로마의 카타콤에 그려진 프레스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수유 장면은 행복한 정경을 그리기 위해 선택된 소재로 볼 수도 있지만, 성모의 젖은 신의 말씀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의 젖은 아기 예수뿐 아니라 온 인류가 섭취해야 할 생명의 양식이다. 성모의 푸른 옷은 그녀가 단순한 어머니가 아니라 하늘의 여왕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젖은 하늘의 양식인 것이다.
성모 곁에서는 아기 천사가 성모의 투명한 베일을 들어 성모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천사의 그런 행동은 성모의 얼굴을 관자가 보다 잘 볼 수 있게 해주려는 배려이기도 하지만, 서양회화에서 베일을 든다는 것은 진리, 혹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천사는 단지 성모를 드러낸다기보다는 성모의 수유 장면 자체를 드러냄으로써 말씀과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로레토의 마돈나>(1509-10년 경)에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마리아가 친히 아기로부터 베일을 걷어냄으로써 아기 예수가 진리임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엔의 그림에서는 성모자 주위에 두 마리의 앵무새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기독교 동물 상징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피지올로구스’에서 앵무새는 찬양이나 의로운 행위에 대한 모방을 상징하는 존재로 이야기된다. 사람의 말을 따라하는 동물인 까닭에 그런 의미가 주어졌다. 이로써 우리는 이 그림으로부터 말씀을 사모할 것과 말씀에 따라 의를 실천하며 살아갈 것을 중요한 종교적 가르침으로 얻을 수 있다.
글 | 이주헌
미술평론가, 양현재단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