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희의 ‘이야기가 있는 명품’

 

[아츠앤컬쳐]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이른 아침부터 생제르망 데 프레 지역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나의 발은 애처롭게 퉁퉁 부어 있다. 짧은 일정에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많이 걸은 게 문제다. 발이 붓고 종아리가 뻐근해져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에 아름답고 화려한 구두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예술작품만큼 멋진 구두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크리스챤 루부탱, 주세페 쟈노티, 세르지오 로시, 디자이너
구두 편집샵 아이리스(IRIS).....

아름다운 구두를 보면 카타르시스를 느끼듯 엔돌핀이 솟는 나는 언제 다리가 아팠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구두 매장으로 갔다. 빨간 루부탱 구두가 눈부시게 섹시하다. 쇼 윈도우에 코가 닿을 듯 바싹 붙어 빨간 구두를 나의 카메라에 담고 있을 때였다.

“Excuse moi?"
부드러운 목소리의 프랑스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젊고 예쁜 여성과 미소 지으며 서 있는 남자는 나에게 사진을 좀 찍어달라고 했다.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말하고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남자는 싱글싱글 웃으며 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달란다. 나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당신 카메라를 달라고 했더니 내 카메라로 자기들을 찍어 달라고 똑같은 말을 했다.

내 카메라로 너희들을 찍어 달라고? 왜? 의아해서 물었더니 그냥 어서 빨리 찍어달란다. 얼떨결에 일단 두 사람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을 찍고 나니 이번에는 내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나를 찍어 주겠단다. 혼자 간 출장이라 제대로 된 독사진 하나 없었던 나는 반가운 마음에 주저하지 않고 카메라를 건넸다. 그런데 카메라를 건네받은 남자는 카메라를 여자 친구에게 주고 나의 어깨를 그의 팔로 힘차게 감싸 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내 손에 있던 나의 안경까지 빼앗아(?) 자기 얼굴에 썼다. 순간 낯선 남자의 팔에 안겨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나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아! 이 사람, 소매치기구나! 파리 커플 소매치기! 다가와 말을 거는 것도 수상하고 저 어린 여자애가 계속 웃기만 하는 것도 이상해. 내 카메라를 들고 저 여자는 분명 도망칠 거야. 내가 따라잡지 못하게 이 남자가 나를 꽉 잡고 있는 거고....그리고 저 여자가 잡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지면 이남자도 줄행랑치겠지? 내 안경까지 갖고 말이야. 당했구나!’

주변을 둘러보니 거리에는 인적이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머리가 복잡해진 내가 당황해 하며 표정이 굳자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웃으라고 말했다. 웃어야 사진에 예쁘게 나온다며.....불어로 계속 뭐라고 말을 하는 남자와 카메라를 들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프랑스 여자, 두 사람 사이에서 혼이 나간 듯 어리바리해진 나는 그의 말에 어설픈 미소를 짓고 사진을 찍었다. 머릿속에는 이 사람들이 내 카메라를 들고 도망가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처음 본 낯선 남자와 얼떨결에 사진을 찍었다. 젊은 여자는 카메라를 나에게 건네주었고 남자 역시 내 안경을 벗어주었다. 카메라를 받으며 나는 약간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나에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Korea"라고 대답하니 갑자기 “오, 코리아! 이쁘다”라고 말한다. 어머나! 이 프랑스 남자가 한국말을 했다! 그는 한국말을 아주 조금 할 줄 안다고 했다.

멀리서 걸어오면서부터 길바닥에 앉아있던 나를 봤단다. 내가 많이 피곤해 보여 즐겁게 해주고 싶었단다. 자기네가 이렇게 해서 잠시라도 재밌었냐고 물었다. 그리고 내가 이뻐서 자기가 같이 사진을 찍어 준 거란다. 자기는 예쁜 여자하고만 사진을 찍는다며. 참 유쾌한 남자였다. 파리에서 즐거운 추억을 가져가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Repetto!!!”
내 구두가 높아서 더 피곤했을 거라며 길 건너 드래곤(Dragon)가에 있는 레페토에 가보라고 했다. 레페토를 신으면 덜 피곤할 거라며....자기 여자 친구도 좋아하는 브랜드라면서.

‘Bon Voyage!!!'’라고 환한 미소로 인사를 하며 유유히 사라지는 두 사람을 한참 바라봤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귀신에 홀린 듯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나는 한바탕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파리에 가면 소매치기에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뼛속까지 박혀 있는 나는 그들을 100% 소매치기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순수한 의도를 나쁘게 해석한 나의 마음을 그들은 눈치챘을까? 어쨌든 피곤에 지쳐 길바닥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동양 여성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는 파리 남자의 재치 넘치는 즐거운 배려는 파리를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잠깐의 공포가 유쾌한 즐거움으로 바뀐 나는 그가 추천해 준 레페토(repetto) 매장으로 향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선 순간 마치 발레복을 입고 춤을 추던 꼬맹이 시절로 되돌아간 듯 행복한 착각에 빠졌다. 레페토 매장에서는 누구나 발레리나가 되는 것 같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영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맘보를 출 때 신은 ‘레페토 비비’부터 <카르멘>의 주역으로 빛나는 발레리나 지지 장메르의 이름을 따서 만든 레이스 업 슈즈 ‘레페토 지지’까지...다양한 색상과 디자인의 레페토 슈즈와 벽에 걸린 오래된 발레리나 슈즈 사진을 구경하면서 발레를 하듯 우주 공간을 유영하듯 사뿐사뿐 나비처럼 걸으며 얼마나 행복하게 휴식했는지 모른다.

1시간 넘게 매장에 머무른 나는 3cm 굽의 블랙 컬러 레페토 슈즈로 갈아 신고 매장을 나왔다. 날아갈 듯이 발이 가벼웠다. 신지 않은 것 같은 편안한 슈즈가 주는 즐거움. 진정한 파리 출장의 즐거움은 그 시간부터 시작되었다. 파리를 더욱더 사랑하게 만든 낯선 남자와의 즐거운 에피소드와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준 레페토 슈즈. 그 둘은 모두 나에게는 첫 만남이었지만 평생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고 슈즈가 되었다.

발레리나 슈즈로 유명한 프랑스 브랜드 <레페토(Repetto)>는 1942년 테일러 핵터드 감독의 영화 <백야>에서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춘 <젊은이와 죽음>을 안무한 발레리노 롤랑 프티의 어머니 로즈 레페토가 만든 브랜드다. 발레를 하는 아들이 토슈즈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 발이 아프지 않게 가벼운 염소 가죽을 밑창에 박음질한 뒤 뒤집어 만든 레페토 슈즈는 맨발로 신어도 아프지 않고 아주 가벼운 슈즈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만든 슈즈가 당시 파리의 무용수들에게 큰 인기를 끌자 로즈 레페토 여사는 1947년 파리 오페라 하우스 옆에 가게를 열고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판매를 시작했다.

레페토 슈즈가 유명세를 탄 것은 오드리 헵번이 영화 <로마의 휴일>에 신고 나오면서 부터다. 왕실에서 벗어나 로마의 거리를 자유롭게 활보하던 오드리 헵번의 발걸음에서 보여주듯 오드리 헵번이 레페토 슈즈를 신고 있는 그 한가지만으로도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두 전달했다.

2010년 3월 파리 출장 때 레페토를 처음 신은 나도 그랬다. 굽 높은 펌프스를 벗어던지고 레페토로 갈아 신은 순간, 형식을 버리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했으니까!

유난희
명품 전문 쇼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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