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헌의 ‘행복한 그림읽기’
[아츠앤컬쳐] 인상파의 두 거장 마네와 모네. 두 사람은 이름이 비슷해 이들의 작품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어느 작품이 누구의 것인지 구별이 안 간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비슷한 이름은 후배 모네가 막 화단에 나섰을 무렵 파리의 미술인들도 혼돈스럽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인상파를 이끈 지도자로서 두 사람은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점이 많았다. 도시적이고 찰나적인 감수성을 선호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유사성이 있지만, 모네의 경우 빛의 효과에 대해 보다 집요한 관찰과 탐구를 더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마네와 모네, 두 사람 다 인상파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 가운데 보다 철저한, 보다 근본적인 인상파 화가는 모네였던 것이다.
한 비평가가 마네의 <에밀 졸라>(1868)를 보며 말했다.
“저 바지 그린 것 좀 봐. 세상에 저런 옷감이 어디 있겠나? 옷이 옷 같지가 않구먼!”
그러자 마네의 옹호자가 대꾸했다.
“그렇지. 저건 옷감이 아니라 물감이라네.”
인상주의의 대부 에두아르 마네(1832-83). 그는 “평면 자체를 보아야지 평면을 통해서 보면 안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앞서 마네의 옹호자가 한 말과 같은 생각을 담은 말이다. 과연 마네가 지향한 예술세계란 어떤 것인가?
마네가 평면을 보아야지 평면을 통해 보면 안 된다고 한 것은, 그림은 그 자체로서 감상하고 즐기는 대상이 되어야지, 그것을 넘어 그려진 사물 자체에 대한 이해나 그 사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 중시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니까 그림에 그려진 사물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만들어내는 조형적 효과와 감각을 즐기는 것만으로 미술 감상은 족하다는 말이다. 모델이 되었던 에밀 졸라도 이런 마네의 태도를 적극 격려했다. 그래서 벌거벗은 여인을 그린 마네의 <올랭피아>가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때 졸라는 마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 화환과 어두운 부분의 흑인 여인네와 검은 고양이, 이것이 다 무얼 의미하느냐고? 화가인 당신도 잘 모른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내가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당신은 훌륭한 그림을 그려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생생하게 이 세상을 풀어냈고, 빛과 어둠의 진실, 사물과 인간의 실재를 독특한 문법으로 표현해낸 것이다.”
미술에 대한 마네의 이와 같은 ‘현대적인’ 입장은 기존의 고전주의 미술과 아카데미즘에 대한 ‘발칙한’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살롱 전에 자주 낙선하고 오랫동안 충분한 수량의 그림을 주문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득권 세력과 빈번히 충돌함으로써 그는 매우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그의 주위에 젊은 화가들이 모여들어 형성한 유파가 바로 인상파다. 마네는 한 번도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 그들의 대부가 되었다.
작품 <에밀 졸라>를 좀 더 세밀히 살펴보자. 이 그림은 사실 원근감도 그리 뚜렷하지 않다. 졸라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졸라와 뒤쪽 벽 사이에는 웬만큼 거리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벽의 어두운 색과 졸라의 옷과 머리의 어두운 색이 거의 비슷해 심지어 둘 사이에 거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옷의 검정색은 명도의 변화가 별로 없어 마치 색종이를 오려붙인 듯하다. 이처럼 거리감과 양감의 표현조차 불충분하니 당대의 아카데미 화가들이 들고일어날 만 했다. 하지만 마네에게 옷이나 벽 같은 것은 검정 색을 쓸 좋은 수단 혹은 기회로 족했다. 사람의 얼굴과 옷, 책, 벽 중에서 보다 중요하거나 보다 가치가 있는 것은 따로 없다. 적어도 회화 내에서 이들의 가치는 동일하다. 모든 게 물감으로 칠해진 색이요, 형태일 뿐인 것이다. 그렇게 대상을 단순화해 보고 그 단순함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시대의 명령이라고 마네는 생각했다.
이렇게 그림의 주제나 내용보다 조형과 형식을 중시하고 거기에 시대의 감성을 담은 마네는 ‘문학적인 미술’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조형적인 미술’로 나아간 역사상 최초의 화가가 되었다. 이런 그를 기려 프랑스의 문인 조르주 바타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자 그대로 현대적인 회화가 태어났다고 말할 때 그 현대회화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마네로부터 시작됐다.”
그런가 하면, 인상파의 인상이라는 말은 클로드 모네에게서 비롯되었다. 모네는 1873년 <인상-해돋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을 본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모네와 그의 친구들이 예술의 본질은 추구하지 않고 인상 같이 표피적인 부분만 추구한다고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다. 비록 부정적으로 지어준 이름이기는 하지만, 찰나와 순간을 소중히 여긴 인상파의 특징을 잘 꼬집어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모네는 찰나와 순간의 느낌을 특히 빛의 표현을 통해 극대화하고자 했다. 이 세상에 빛만큼 빠른 것도 없고 빛만큼 찰나적인 것도 없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빛의 표현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떠나갈 때도 모네는 오랫동안 빛의 화가로서 인상파를 지켰다. 빛에 대한 그의 집요한 추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1879년 9월5일 모네는 아내 카미유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냈다. 그로서는 너무도 견디기 힘든, 괴롭고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비록 갈등도 있었지만, 우리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조강지처였던 아내 카미유를 모네는 가난 속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그 날 그가 한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 “마지막으로 아내의 목에 걸어주게 저당 잡힌 아내의 메달을 찾아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노라면, 어려운 시절 아내를 사별한 남자의 비통함과 쓸쓸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때 그는 아내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스스로에 대해 매우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내게 매우 소중했던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마침내 죽음이 찾아왔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놀라고 말았다. (아내의 주검 위로)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 나의 깊숙한 본능은 벌써 색채의 충격에 반응하고 있었다.”
아내의 임종 자리에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색채의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좇은 화가. 도대체 그 경황 중에 어떻게 빛과 색의 놀이에 마음을 둘 수 있었을까?
생사를 가르는 절박한 순간에도 모든 사물에 공평하게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빛.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그럴 수 없이 정직하게 가르쳐주는 순간의 빛. 모네의 눈이 그 빛을 좇은 것은 그만큼 자신이 추구해온 빛 자체가 인생과 세상의 이치를 그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인생은 억겁의 세월 속에 잠시 반짝이는 별똥별 같은 것이었고, 화가의 눈과 붓은 그 빛을 반사하는 맑은 거울 같은 것이었다. 아내의 짧은 삶과 가엾은 죽음이 비통하고 한스러울수록 아내와 빛은 하나가 되어 그의 눈길을 영원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잔은 말했다.
“모네는 하나의 눈이다. 그러나 그 눈은 진정 얼마나 대단한 눈인가!”
모네는 카미유와의 사별 경험을 결국 아스라한 푸른빛과 잿빛의 슬픈 그림으로 남겼다.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있는 <세상을 떠나는 카미유 모네>(1879년)에서 우리는 찰나의 빛에도 슬픔과 고통, 아쉬움, 미련, 그리움 등의 다양한 정서가 형형색색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모네의 빛은, 빛의 인상은, 이렇듯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예리한 통찰의 결과물이다. 이런 빛의 화가로서 모네의 진가를 높여준 또 다른 대표작의 하나가 ‘루앙 대성당’ 연작이다. 뒤랑 뤼엘 화랑에 내 걸린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을 처음 본 모네의 절친 조르주 클레망소는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네는 이 성당을 50점, 100점, 1000점이라도 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렸어야 했다”고 외쳤다고 한다.
모네가 그린 이 성당 그림은 모두 30여 점이다. 이처럼 같은 대상을 반복해 그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지만, 클레망소가 외쳤듯 이 연작은 하나하나가 새롭다. 그것은 이 연작의 진정한 대상이 성당이 아니라 빛이며, 모네가 같은 성당을 여러 번 그린 것은 실은 새벽, 아침, 낮, 저녁, 안개 낄 때, 비가 내릴 때 등등 온갖 기상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빛을 그리려 했기 때문이다. 인상파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준 이 연작은 이후 ‘대성당의 혁명’이라는 찬사를 듣게 되었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