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페스트가 처음으로 발생한 시기는 1346년으로, 크리미아반도의 교역의 중심지였던 카파(Caffa) 시를 몽고제국의 한 군대가 공격하면서 전염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1347년 이탈리아 전역, 1348년 프랑스, 1349년 영국 등 북유럽 전역으로 페스트가 퍼지게 된다. 이렇게 유럽에 상륙한 페스트는 1351년까지 유럽 전체 인구의 30~40%를 몰살시키면서 중세 유럽을 초토화시켰다.
페스트는 크게 2종류로 분류하는데, 쥐로부터 감염되는 선페스트와 페스트에 감염된 환자가 기침을 할 때 균이 포함된 작은 점액의 비말이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서 감염되는 폐페스트가 있다. 전자는 치사율이 약 30~90%로 그 범위가 넓은데 반해, 후자는 치사율이 거의 99%에 이른다. 14세기의 높은 치사율은 바로 이 폐페스트가 만연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높은 치사율을 기록했던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건강 상태와도 관련이 있다. 흉년으로 인한 오랜 기간의 굶주림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도 많았고 어떤 이들은 면역력도 갖추지 못할 만큼 허약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페스트의 유행으로 사람들이 죽자, 남은 사람들은 광기와 미신에 사로 잡히게 된다. 하늘이 내리는 벌이라고 믿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다며 약초를 태우거나 나무의 진액을 구해 사방에 뿌리는 사람들, 특정 집단이 물에 독을 탔다며 그 집단을 죽이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당대인들은 페스트의 발생이 신이 노한 탓이라며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기도행렬을 비롯한 대규모 종교행렬을 벌이기도 했다. 집단행동은 결국 전염을 더 키우게 되고 중세 유럽의 생활 질서 체계는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페스트는 감염 후 살이 썩어 검게 되기 때문에 ‘검은 죽음(black death)’, 즉 흑사병(黑死病, Plague)으로 불렸는데, 유럽의 인구는 2세기가 지난 16세기가 돼서야 페스트 창궐 이전 수준으로 회복된 것으로 알려질 만큼 페스트는 당시 유럽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페스트는 19세기 말 파스퇴르에 의해 치료법이 개발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으나 2012년과 2017년 동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서 수백 건의 발병 사례가 보고돼 약 80명이 사망한 바 있다. 이처럼 페스트는 현재도 아프리카, 아시아 일부 지역 등에서 발생 사례가 나오고 있다.
페스트 하면 연상되는 것이 기이한 복장의 페스트 의사(Plague doctor)들이다. 이들은 페스트 환자를 전문적으로 다루던 의사들로, 14세기 처음으로 출연하여 18세기까지 존속하였는데, 페스트가 유행하는 도시에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하면 특별히 고용되었다.
페스트 의사들의 복장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오버코트와 대개 달콤하거나 강한 냄새가 나는 라벤더 같은 허브를 채운 새 부리 모양의 가면과 챙 달린 모자로 구성된다. 가면에는 시야 확보를 위한 구멍이 있고, 앞서 이야기한 새 부리가 있다. 페스트 의사의 코 앞에 끈으로 부리를 고정하였는데, 허브 등이 담긴 방독면의 일종이었다.
페스트 의사들은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면서도 환자들을 만지지 않고 진찰하기 위해 나무로 된 지팡이를 사용했다. 지팡이는 또한 사람을 멀리하기 위해 사용하였는데, 이것으로 아무런 접촉 없이 감염자의 옷을 벗기고 환자의 맥박을 잴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독특한 복장은 17세기에 처음 등장한 것이고, 그 이전의 페스트 의사들은 아무 보호 장비도 없이 환자를 돌보았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발병하고 있는 전염병인 코로나19(COVID19)에도 수많은 의료종사자들의 희생이 따른다. 옆 나라에서는 의사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전염병에 대한 대응도 발전했지만 수많은 의료진의 희생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많은 의료 종사자들은 환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했고, 우리는 지금도 그들을 만나고 있다.
그런데 의사에게 환자에 대한 법적치료의무가 있는 것일까? 계약에 있어서는 사적(私的) 자치가 그 원칙이기 때문에, 단순히 환자와 의사 사이의 의료 계약도 이와 같은 계약이라고 본다면, 계약 자치가 적용된다. 즉, 환자가 마음대로 의사를 선택하여 치료받을 수 있는 것처럼 의사에게도 역시 환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의사는 자유로운 결정에 의하여 감염병 환자와 의료 계약을 체결하여 그 치료를 맡을 수도 있고, 또한 의료계약의 체결을 거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의사가 이미 환자의 치료행위를 개시했더라도, 환자에게 그 건강에 대한 위험 없이 다른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 언제든지 그 의료계약을 해지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의사가 도덕적으로 환자의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별개로, 법적으로는 환자를 반드시 치료하여야 할 의무가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위와 같이 사적 자치에만 맡길 수 없기 때문에 현행 의료법은 의료의 적정과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하여 의료인의 진료 거부 금지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의료법 제16조 제1항은 “의료인은 진료 또는 조산의 요구를 받은 때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사는 진료 요청이 있을 때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진료 의무를 진다. 의사에게 정당한 이유가 있었느냐의 여부는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 결정되므로 사실 법문을 봐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법원은 ‘정당한 사유’란 진료를 할 수 없었다고 일반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정이 있을 때를 말한다고 한다. 예컨대 의사가 부재중이거나 신병으로 인하여 진료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고 본다. 다만, 단순히 피곤하다든지 또는 그 환자는 기분이 나빠서 진료하기 싫다든지 하는 것은 진료 거부에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고 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밖에 진료거부에 있어서 정당한 이유의 범위 및 한계에 대한 해당 부처의 유권해석을 보면(1980년대 해석이므로 현재의 법감정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 ① 환자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진료 시설 혹은 진료 과목이 없어 그 환자의 진료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다른 의료기관으로 이송하는 경우, ② 의사의 부재 또는 건강 상의 이유로 진료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미 휴진 게시를 해둔 경우, ③ 입원실이 만원이라 입원이 도저히 불가능한 경우, ④ 전신마취가 필요한 수술 환자인데, 병원에 마취전문의가 없는 경우, ⑤ 환자가 의사의 지시에 불응하는 등 치료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다른 의료기관의 치료를 권고한 경우, ⑥ 의사가 고령이거나, 일시적 음주 상황, 또는 건강 상의 이유로 환자의 진료나 수술이 불가능하고, 진료나 수술을 강행하다가 도리어 환자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등을 정당한 사유라고 보고 있다.
1980년대에도 전염병에 대한 감염 위험은 진료를 거부할 수 있을 정도의 정당한 사유로 보고있지 않았다. 감염 위험은 어느 질병에 있어서나 존재하는 것이며, 특히 감염병 환자의 치료 행위에 있어서는 보호 도구 착용 등 치료 시의 세심한 주의 등에 의하여 그 감염 위험을 얼마든지 배제할 수 있으므로 현재도 감염 위험에 의한 진료 거부가 정당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 | 이재훈
문화칼럼니스트, 변호사, 고려대학교 겸임교수,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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