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복이 된 문무백관의 사모(紗帽) 사진:국립민속박물관
혼례복이 된 문무백관의 사모(紗帽) 사진:국립민속박물관

 

[아츠앤컬쳐] 오브제는 사람의 마음을 대신 전달하는 신기한 힘이 있다. 모자 역시 그러한 오브제 중의 하나이다. 모자를 사랑하고 즐겨 쓴 우리 민족은 군주와 신하, 백성이 서로에 모자를 통해 그 마음을 전하였다. 그럼으로써 모자가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오브제인지를 느끼게 한다.

정조대왕이 선물한 털모자 / 발췌-역사채널e
정조대왕이 선물한 털모자 / 발췌-역사채널e

일례로 수원성 축조(1794.1~1796.9) 당시 정조대왕이 인부들에게 선물한 털모자 이야기다. 정조대왕은 당시 정3품 이상의 양반만 쓸 수 있었던 털모자를 일반 인부들에게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꾼들이 말하기를 추위 속에서 일을 하고도 아프지 않은 것은 임금님의 지성 덕분이고 모자 하나가 추위 걱정이 없게 한다고 합니다.”-화성유수 조 심태의 장계 中-

당시 수원성 축조는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정조의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거중기, 녹로 등 신 기재를 이용하여 10년 예상의 공사를 3년 만에 완성한 바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공사기간 단축에 가장 큰 공은 일반 백성들에게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들의 추위까지 걱정하여 모자를 선물하고 백성들을 보살피고자 했던 정조대왕의 따듯한 군주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발췌-로버TUBE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발췌-로버TUBE

또 다른 예는 조선말기의 관료로 을사늑약 체결 직후 자결 순국한 충정공 민영환(1861~1905)과 관련된 이야기다. 고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그는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김득련·김도일 등을 대동하고 참석하게 되었다. 일행은 인천을 떠나 상해, 나가사키, 동경, 캐나다, 뉴욕, 런던,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지나는 긴 여정 끝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니콜라이2세 대관식포스터
니콜라이2세 대관식포스터

이렇게 어렵게 가게 된 니콜라이 2세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정작 입장하지 않은 사연이 있다. 당시 러시아는 대관식에 참석할 때 모자를 벗어야 하는 법이 있었다. 민영환은 대한제국 관복을 입고 입장하고자 하였으나 문제는 관모였다. 관모를 벗어야만 입장할 수 있다는 요구에 “우리의 법도와 예의가 있거늘 결코 이 모자를 벗을 수는 없다.”하여 결국 대관식 본 행사장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행인 윤치호가 민영환을 끝까지 설득시키려 했으나 결국은 실패했다고 하는 후일담도 있다.

보물 제904호
보물 제904호

다음으로는 대한민국 보물 제904호 이야기다. 이 보물은 우리 민족의 전통모자가 아닌 ‘그리스 투구’인데, 서구유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보물의 주인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 님이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으로 들어오는 손기정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으로 들어오는 손기정

당시 올림픽위원회에서는 1900년 파리올림픽부터 1936년 베를린올림픽까지 마라톤 우승자에게 고대 그리스 유물을 부상으로 주었는데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는 더욱 특별한 부상으로 BC 8세기에 제작된 고대 그리스 청동투구를 부상으로 주었으나 일본이 이 사실을 숨겨 이 투구는 손기정 님에게 전달되지 않고 그동안 독일 베를린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독일 박물관 측이 여러 차례 반환 요청을 거부해왔으나 유물 기부국인 그리스의 협조로 드디어 1986년 50년 만에 손기정 님에게 반환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우리가 이처럼 모자를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모자에 깃든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고귀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조현종
조현종

글 | 조현종
㈜샤뽀 / 루이엘모자박물관 대표이사, 전북대학교 겸임교수/경영학박사, (사)하이서울기업협회 협회장, (사)한국의류산업학회 산학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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