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알함브라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알함브라

[아츠앤컬쳐]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의 유서 깊은 도시 그라나다(Granada)의 구심점은 알함브라(Alhambra)이다. 언덕 위에 세워진 알함브라는 이베리아 반도를 8세기 동안 점령한 이슬람의 마지막 보루이자,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기독교 왕조의 전리품이었고, 한때는 폐허로 버려졌으며, 다시 낙원으로 부활했다. 즉 알함브라의 역사는 곧 파괴와 망각, 그리고 재발견의 역사다.

알함브라는 13~14세기 이슬람의 왕조 시기에 건설된 요새 및 궁전 복합체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문화가 남긴 가장 찬란한 유산이다. 그 이름은 붉은 흙과 석재로 지어진 성채의 색에서 비롯된, ‘붉은 성을 뜻하는 아랍어 알-함라(al-Ḥamrāʾ)에서 유래한다. 알함브라의 외관은 군사 요새처럼 우람하지만, 내부로 들어서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물이 흐르고, 빛이 반사되며, 기하학 문양과 문자 장식이 반복되는 공간은 이슬람이 상상한 낙원을 지상에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14921, 카톨릭 부부군주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그라나다를 함락한 다음알함브라는 그들의 궁정으로 사용되었고 그들의 손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5세는 이곳에 자신의 궁전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착공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정치적 중심은 점차 마드리드로 이동했고, 알함브라는 서서히 변방으로 밀려났다. 화려했던 알함브라는 점차 관리의 손길을 잃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고, 아울러 카를로스 5세의 우람한 궁전도 끝내 완공되지 못한 채 이질적인 존재로 남았다.

내부 궁전의 섬세하게 장식된 벽과 기둥
내부 궁전의 섬세하게 장식된 벽과 기둥

알함브라의 운명이 가장 혹독하게 흔들린 시기는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때였다. 1808년부터 스페인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이곳을 군사 거점으로 사용하면서 궁전 내부에 막사를 설치하고, 장식과 구조물을 무참히 훼손했다. 특히 1812년 철수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알함브라의 여러 탑과 성벽을 폭파했다. 다행히도 일부 폭약이 불발되면서 완전한 파괴는 피할 수 있었지만, 이때 입은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알함브라는 더 이상 낙원의 모형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폐허로 남을 뻔했던 것이다.

잊혀진 알함브라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 것은 한 미국인이었다.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워싱턴 어빙은 1829년 그라나다에 머물며 실제로 알함브라 궁전 안에서 생활했다. 당시의 알함브라는 지붕이 무너지고 벽화가 벗겨진 채, 떠돌이와 빈민들이 드나드는 장소였다. 어빙은 이 폐허 속에서 무너진 문명의 잔향을 읽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알함브라 이야기(1832)를 집필했다. 어빙의 글은 전설과 상상, 기록과 감상이 뒤섞인 낭만주의적 산문이었다. 그의 책을 통해 유럽과 미국의 독자들은 알함브라를 잃어버린 문명의 낙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폐허였던 알함브라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예술가와 여행자들이 그라나다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스페인 정부는 1870년 알함브라를 국가기념물로 지정하고 본격적인 보존과 복원에 나섰다. 물론 초기 복원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무리한 재현과 낭만적 상상이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은 알함브라를 완전한 소멸로부터 구해냈다. 폐허는 유산으로 전환되었고, 잊힌 궁전은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함브라 야경
알함브라 야경

19세기 말, 복원이 상당 부분 진행되던 시기에 그라나다를 방문한 기타리스트 프란시스코 타레가는 알함브라에서 받은 인상을 음악으로 남겼다. 알함브라의 추억은 물소리처럼 이어지는 트레몰로 주법을 통해 사라진 시간을 붙잡으려는 기억의 진동처럼 다가온다.

오늘날 알함브라는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이 궁전은 결코 그대로 보존된 과거가 아니다. 전쟁에 의해 파괴되고, 방치 속에 무너졌으며, 낭만주의의 시선에 의해 재해석되고, 복원을 통해 다시 구성된 결과물인 것이다. 알함브라는 그렇게 여러 시대의 손길을 거치며 부활했다. 그러고 보면 알함브라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그 찬란한 아름다움뿐 아니라, 상처 입고 되살아난 기억의 힘 때문일지도 모른다.

 

글·사진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외에도 음악, 미술, 역사, 언어 분야에서 30년 이상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했으며 국내에서는 칼럼과 강연을 통해 역사와 문화의 현장에서 축적한 지식을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동유럽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외에도 여러 권 있다. culturebo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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