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일상의 위트, 그 속에 깃든 삶의 애틋한 응시

최석운, Vacances 4, 2025, Acrylic on canvas, 150x150cm
최석운, Vacances 4, 2025, Acrylic on canvas, 150x150cm

 

[아츠앤컬쳐]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과 일상의 풍경을 특유의 해학적 시선으로 포착해온 최석운 작가가 삼청동 호리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 <FIGURE SCENES>를 연다. 이번 전시는 그가 수십 년간 천착한 유머와 풍자의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대상을 응시하는 작가의 관점이 한층 유연하고 깊어졌음을 알리는 30여 점의 신작을 선보이는 자리다.

최석운, Balcony 1, 2025, Acrylic on canvas, 145.5x112cm
최석운, Balcony 1, 2025, Acrylic on canvas, 145.5x112cm

최석운의 시선은 최근 구체적인 ‘인간’의 재현을 넘어, 박제된 존재로서의 ‘피규어(Figure)’로 확장되고 있다. 피규어는 실재하는 대상의 외형을 본떴으나 정작 생명력은 거세된 존재를 은유한다. 대상을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형태를 비틀어 해학을 극대화한 그의 화풍은 여전하지만, 화면 속 인물들은 이전보다 더욱 뻣뻣하고 조형적인 이미지로 굳어졌다. 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조금 더 객관적이고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하려는 작가의 의도적 장치로 읽힌다.

최석운, I Love You, 2025, Acylic on canvas, 145.5x112cm
최석운, I Love You, 2025, Acylic on canvas, 145.5x112cm

알베르 카뮈는 그의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 ‘부조리한 벽’ 장에서 “어떤 교묘한 몸짓들 속에서, 그리고 어떤 풍경 속에서 사람들의 저 무의미한 몸짓을 보며 우리는 저들이 왜 사는지 자문한다. (중략) 이 세계의 두터움과 낯설음, 그것이 바로 부조리다”라고 말했다. 평소 아무 의심 없이 보던 타인의 행동이나 풍경이 어느 순간에 마치 ‘무대 위의 연극’처럼 생경하게 느껴지는 찰나를 포착한 표현이다.

최석운, 소파 위의 남자, 2025, Acrylic on canvas, 91x73cm
최석운, 소파 위의 남자, 2025, Acrylic on canvas, 91x73cm

최석운이 살아있는 인물을 마치 피규어처럼 그려낸 것 역시 이 카뮈의 비유와 흥미로운 지점에서 만난다. 다만, 작가가 제시하는 이 ‘낯설게 보기’는 냉소적인 비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이웃의 표정, 유기견의 눈빛, 길가에 핀 모란의 숨결을 ‘박제된 한 장면’으로 고정함으로써, 관객이 그 대상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누도록 이끄는 다정한 초대장에 가깝다.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인 아크릴 물감의 선명한 색채는 이러한 정적인 인물들에서 따스한 온기를 발견하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을 새삼스럽고 소중하게 되돌아보길 권한다.

일상에서 포착한 장면(scenes)들은 작가의 내밀한 경험과 세밀한 관찰의 기록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바캉스(Vacances)> 연작은 유기견 구조 에피소드를 시각화한 것이다. 화려한 돗자리 위에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개들의 모습은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생명을 대하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책임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즐거운 휴가를 연상시키는 제목 속에 담긴 이 정적인 배치는, 관객에게 무거운 질책을 던지기보다 우리가 잊고 지낸 ‘공존의 가치’를 해학적으로 되묻는다.

최석운, Balcony 2, 2025, Acrylic on canvas, 112x145.5cm
최석운, Balcony 2, 2025, Acrylic on canvas, 112x145.5cm

심리적 긴장감이 투영된 <발코니> 연작 또한 흥미롭다. 작가 자신의 고소공포증이 투영된 이 작품 속에서, 여유로운 타인들 사이로 움츠러든 남성은 우리 가슴의 한구석에 품고 사는 보편적인 불안과 서툶을 대변한다. 등장인물들을 피규어처럼 배치해 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면서도, 그 틈새로 흐르는 미묘한 위트는 관람자에게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라는 식의 묘한 안도감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배경의 평면적인 처리와 고정된 시선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순간을 완성하며, 관람자의 시선이 그 생경하고도 정겨운 틈새에 머물도록 유도한다.

최석운은 시대적 사유를 특유의 감성적 풍자의 틀로 시각화한다. 어떤 단정적인 메시지를 강요하기보다, 작품이 뿜어내는 생경한 분위기와 조형적 위트를 통해 우리 각자가 삶의 이면을 담백하게 마주하게 하는 것이 탁월한 매력이다. 이번 전시는 다음 달 2일까지 이어지며, 캔버스 위의 박제된 풍경들이 건네는 다정한 유머와 일상의 숨결을 만끽할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글 ㅣ 김윤섭

미술사 박사

예술나눔 공익재단 아이프칠드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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