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한국을 대표하는 산수화가를 꼽으라면, 아마도 제일 먼저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을 떠올릴 것이다. 겸재는 단원 김홍도과 혜원 신윤복, 표암 강세황 등과 함께 한국 전통회화의 정수(精髓)를 이룬 인물로 손꼽힌다. 특히 그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독창적인 화법을 완성함으로써, 조선회화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사한 용어로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라는 말도 있는데, 둘은 엇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
그럼 ‘진경산수’와 ‘실경산수’의 뜻은 무슨 차이로 이해해야 할까? 우선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단어로만 보자면, ‘진짜 풍경을 그린 산수화’ 정도로 풀이된다. 상대적으로 ‘실경산수화’는 기록을 목적으로 ’실제풍경을 그린 것’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그렇게 볼 때, 겸재가 말하는 ‘진짜배기 풍경’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가 의아하다. ‘실제보다 더 진짜 같은 풍경’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진경산수화는 단순한 기록화 기능을 넘어 ‘작가적 재해석’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아마도 겸재는 조선의 풍경이 지닌 ‘진정한 풍미와 미감’을 화폭에 옮기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자신만의 감성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결과’로써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으리라 짐작된다. 때문에 겸재의 그림이 더없이 친근하면서도 남다른 매력을 발산할 것이다. 풍경의 외관보다 그 이면에 담긴 진기(眞氣)를 이 끌어낸 겸재의 그림에선 감상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발산된다. 이러한 겸재의 깊은 사상과 탁월한 조형성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뜻을 기린 ‘겸재진경미술대전’ 역시 10여년 훨씬 넘게 이어오고 있다.
올해 ‘제14회 겸재진경미술대전’의 대상을 수상한 작가가 바로 백정희 작가이다. 대학원 과정을 갓 수료한 젊은 작가가 쟁쟁한 기성 작가들과 겨뤄 이뤄낸 성과라서 더욱 놀랍다. 온갖 풍경들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화폭에 그린 응모작들이 많았음에도 당당하게 백작가가 대상의 영예를 거머쥔 이유는 따로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겸재의 정신성과 조형의지를 현대적으로 탁월하게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전통적인 기저(基底)의 큰 맥락은 잇되, 제작 단계의 표현기법은 철저하게 자기만의 방식을 개발한 것이다.
백정희 작가의 작품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이해가 더 쉽다. 먼저 그리고 싶은 풍경을 대략적으로 드로잉 구상작업 한다. 이어서 드로잉 작업을 바탕으로 실제풍경을 사진 찍거나,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도판을 구해서 화면에 재구성해 스케치 한다. 구체적으로 형태나 형상을 묘사하고, 채색을 가미하는 단계에선 철저하게 작가 내면의 감성 이입에 충실하다. 이때 전통적인 준법(皴法)을 대신해 자신이 새롭게 개발한 조형기법을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을 보면,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미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을 좋아하고 갈망한다. 그러나 자연을 찾아가기란 쉽지 않다. 특히 바쁜 현대인은 주로 매스미디어를 통해 자연을 접한다. 우리는 오히려 그것에 익숙해져 간다. 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디스플레이장치를 통해 바라본 자연풍경을 화폭에 담고 있다. 아날로그의 자연을 디지털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 디지털의 산과 바위ㆍ물 등을 새로운 제3의 공간에 작가적 시선으로 재배치한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산이자 자연풍광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픽셀처럼 평면에 쪼개어진 점과 미세한 면들뿐이다.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는 부분의 조합이란 가장 기본적인 순리이자 진리를 시각적으로 옮긴 것과 같다.”
백정희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하나하나 수를 놓듯 스케치를 한 후, 모자이크 파편처럼 잘게 쪼개듯 채색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일명 ‘픽셀(Pixel) 산수화’로 부른다. 픽셀은 ‘디지털 이미지 상에서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은 작은 단위의 점(點)’들을 뜻한다. 백 작가의 그림은 바로 아주 작은 단위의 ‘인위적인 점’으로 구성된 ‘융합회화’인 셈이다. 조형적으로 볼 때, 모든 그림은 작은 점에서 시작해 선이 되고, 그 선들은 다시 면을 이루며, 면들의 만남은 입체적인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는 작은 돌조각이 모여 바위가 되고, 바위들은 산을 이루며, 산들의 어우러짐이 풍경을 만드는 이치이기도 하다. 때문에 백정희의 픽셀은 풍경의 돌조각과 같다. 또한 그 픽셀은 자연풍경의 출발선이며, 생명의 시작점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옛날 겸재 정선이 당시 첨단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던 직책을 맡은 덕분에 독창적인 진경화풍을 만들어 냈다면, 백정희는 고도의 전자문명인 디지털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감성을 ‘픽셀’이란 개념으로 포착하는 센스를 발휘했다. 겸재가 서양 화법의 일부를 수용해 우리 전통 화법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낸 것처럼, 백정희는 전통적인 준법을 적용하면서도 현재의 시류와 제대로 잘 어울리는 맞춤형 화풍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역량을 높이 평가할 만하겠다.
백정희 작가는 이번 달에 서울 수송동 서머셋팰리스 서울 호텔 레지나갤러리 초대로 개인전을 갖는다.
작가소개 | 백정희
덕성여자대학교 한국화과 및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조형예술학과에서 한국화전공을 수료했다. 개인전 3회와 어퍼더블아트페어ㆍ아트서울아트페어 등에 참여했다. 그동안 제13~14회 겸재진경미술대전 특선 및 대상, 2016 ASYAAF 선정작가, 제3회 전국대학미술공모전 특선수상(프로이즈 후원상), 제18회 관학현대미술대전 특선, 제1회 전국대학미술공모전 입선 등을 수상했다. 주로 한국의 익숙한 자연풍경을 전통적인 진경산수 화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픽셀산수화’를 선보이며 주목을 받고 있다.
필자소개 | 김윤섭
미술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