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돌 판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면 검은 대리석(烏石) 표면에 뭉게구름과 안개가 피어오르는가 하면, 한쪽엔 가느다란 한 줄기 냇물이 흐른다. 그 옆엔 일렁이는 파도를 닮은 긴 이랑들이 가지런하다. 그 묘사는 모두 오돌도돌 하게 쪼아낸 흔적들이다. 참으로 신비롭고 어떤 면에선 경의에 찬 풍광의 연출이다. 아주 단순하지만, 명상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신묘함이 매력적이다. 이런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김종호 작가이다. 대학에선 동양화(한국화)를 전공했지만, 그의 남다른 철학은 돌 판에서 제 빛을 발하고 있다. 쉽게 만날 수 없는 독창적 화풍을 굳이 명명하자면 ‘석각회화(石刻繪畵)’ 정도일 것이다.
김종호 작가의 작품은 보는 이의 감성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마치 주술이라도 부리고 있는 것처럼, 바라보는 어느 순간 그 풍경에 자연스럽게 스미듯 몰입하게 만든다. 그 끌림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아마도 무공해의 힘이겠다. 이런 곳이 한국이 있겠는가 싶을 정도로, 인위적인 인공의 흔적은 최소화 시켰다. 하지만 작가가 경험한 실제의 풍경들이다. 경남 밀양군 산내면 송백 대사리. 김종호 작가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하늘과 맞닿은 산과 들판, 논과 밭 등은 개발 이전의 우리네 정겨운 시골 풍광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풍경에서 깊은 서정성의 공감을 이끌어낸 것도 우리 가슴 속에 잠든 고향의 모습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처럼 김종호 작가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감성의 기억을 자연물인 돌(석판)의 물성에 새겨 넣었다. 그것은 그림이기 이전에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든 태곳적 DNA를 각인한 기념비적 표식일 수도 있다. 인간에게도 회귀본능이 있다고 한다.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화두는 인간이 지닌 연민의 출발점일 것이다. 김종호의 작업은 그런 인간의 순수 본능을 깨우는 감성적 호소력을 지녔다. 단지 고향이나 유년시절의 추억을 되새김하는 것 이상의 의미로 와 닿는다. 현대문명에 친숙한 우리가 첩첩산중 미지의 세계와도 같은, 20가구 내외의 동네를 조우한 순간을 보여준 그의 작품에서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된다.
당시엔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저 그런 일상의 반복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자연의 품 안에서 노닐던 그 순간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우리는 너무나 늦게 깨닫게 된다.그래서 김종호 작가는 일반적인 회화 형식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영원불변할 돌에 그 사연들을 고이 새겨 넣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차분하게 침잠된 풍경이지만, 그 이면엔 가슴에 묻어두었던 온갖 연민이나 그리움과 애환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 여기에 대학에서 전공한 수묵화에 담긴 절제와 비움의 미학을 가미해서 사유적인 면모까지 갖췄다. 전통성과 현대성이 오묘하게 접점을 이룬 시각적 비주얼은 그렇게 태어났다.
김종호 작가 작품의 제작과정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선 그가 오석(烏石)을 선호하는 것은 깊은 맛을 연출하기에 최상의 조건을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오석(烏石)은 한국 고유의 토양의 기운을 머금은 귀한 돌이기도 하기에 우리의 민족적 정서에도 잘 맞을 것이다. 작가는 우여곡절 끝에 선택한 돌 판의 표면을 곱게 갈아낸 뒤, 오랜 시간 마주보는 것으로 그림을 시작한다. 그 돌은 작가에게 무언의 대화를 건네고, 작가는 그런 돌의 마음을 헤아려 ‘최소한의 개입 혹은 연출’을 가미해 그림을 완성한다. 이미 돌 판이 지닌 결의 흐름이나 미세한 무늬까지도 풍경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와 돌은 서로를 배려하며 교감한 이야기를 ‘마음 속 고향’이란 테마로 풀어낸다. 최소한의 조각과정을 거친 후엔, 역시 자연석 고유의 풍미를 살릴 만큼 최소한의 연한 채색만 가미해 완성한다. 최근엔 그동안 20여년 가까이 연마한 ‘석각회화의 절제미’를 화폭에 옮기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처음 본 사람은 돌 판의 작품이나 캔버스의 평면회화나 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동등한 완성도를 지녔다. 물은 깊을수록 고요하다고 했다. 김종호의 작품에서 더없이 깊고 긴 감흥의 여운을 마주할 수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긴 세월 화두정진 하듯, 일관된 진정어린 작가적 고민의 결정체가 바로 그의 석각 회화이다. 평면의 한계성을 창의적으로 극복하고, 자연미와 인간적 교감을 이룬 김종호의 작품에서 ‘전통회화의 새로운 현대적 변용’의 가능성을 엿본다. 숙달된 테크닉 이상의 예술 본연의 진정성과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자성(自問自省)의 실천의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런 끈기와 지구력이 돋보이는 인내심이 오늘의 김종호를 지켜낸 중요한 요소이다. 석화(石花)를 피우듯, 예술가로서의 제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김종호 작가에게서 오석(烏石)의 빛깔을 만난다.
작가소개 | 김종호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동안 마니프조직위원회 주최의 아트페어를 비롯해 11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기획단체전에 참여했다. 최근엔 대학에서 전공한 동양화(한국화) 특유의 공간구성과 회화적 미감을 살린 페인팅과 석판을 다양하게 활용한 돌 그림을 병행하며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매끄러운 석판의 표면에 붓을 대신해 정밀하게 쪼아낸 정의 흔적들은 마치 미세한 대기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처럼 부드럽고 고요한 정감을 자아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필자소개 | 김윤섭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