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책을 살 때마다 그 책을 읽을 시간 또한 사는 거라고.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내가 24시간을 48시간처럼 느끼게 하는 것은 책을 읽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책 구경하러 습관처럼 서점엘 간다. 한참 구경하다 사는 책은 내용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책 자체가 예뻐서 사기도 한다. 책을 사는 일은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혼자 떠난 해외여행이나 출장이라면 일정의 몇 시간은 서점에서 보내는 걸 빠트리지 않는다.
해외 서점에서 책 구경을 할 때마다 가장 부러운 건 표지가 다양하고 예쁜 책이 정말 많다는 거다. 여러 나라의 꼬부랑 글씨로 되어 있는 책 내용은 모두 이해하지 못하지만 책 표지가 마치 한 폭의 일러스트나 명화처럼 멋있고 근사해서 마음을 빼앗겨 넋 놓고 구경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순전히 책 표지가 좋아서 사오고 싶었지만 책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사오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다 정말 기가 막히게 내 맘에 쏙드는 책을 발견했다.
2003년이었던가? 프레타포르테가 열리고 있는 파리에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쇼를 보고 난 후 행사장에서 판매하고 있는 책을 구경했다. 패션과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전시, 판매되고 있었다. 외국에서 만나는 책들은 정작 내용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표지에 가장 먼저 눈길을 뺏기는 편인데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패션과 디자인을 주제로 한 각양각색의 책들은 패션쇼보다 더 버라이어티하고 눈을 즐겁게 했다.
그렇게 책 구경을 하다 한눈에 마음을 사로잡은 책을 발견했다. 화이트 바탕에 블랙 드레스를 입고 진주를 목에 건 샤넬 여사.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샤넬 여사의 모습이 책 표지에 담겨 있었다. 지금이야 샤넬 여사의 모습을 인터넷을 통해서 다양하게 접할 수 있지만 10년 전 그때만 해도 샤넬 여사의 일상은 아무 곳에서나 쉽게 접할 수는 없었다. 특히 책 표지에 있는 그 사진은 처음 보는 샤넬 여사의 젊은 시절 모습이었다. 책을 들었다. 딱딱하고 견고한 하드 케이스는 샤넬 여사의 라이프 스타일과 샤넬 향수 그리고 주얼리 등 3개의 테마로 나누어진 책 3권이 한 묶음으로 되어 있었다. 샤넬 여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명품 브랜드 샤넬의 향수와 주얼리가 근사한 이미지 사진으로, 텍스트는 거의 없이 마치 사진집처럼 되어 있었다.
신선했다. 그런 형식의 책은 우리나라에서 본 적이 없었던지라 신기하고 경외로움에 한참 동안 책을 만지작거렸다. 고급스럽게 양장 된 책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도 그렇지만 무거운 게 신경 쓰였다. 트렁크 무게를 고려한다면 가지고 갈 수 없는 책이지만 나는 샤넬 명품 아이템을 사듯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구입했다.
서울로 돌아와 책꽂이에 꽂아 놓은 샤넬 책은 샤넬 가방을 보는듯한 흐뭇함과 기쁨을 느끼게 했다. 어쩜 이렇게 신선한 기획으로 읽는 책이 아닌 보는 것만으로 읽은 것과도 같은 이해와 감동을 안겨 줄 수 있는지…. 애술린(Assouline)이라는 글씨가 그날 이후 나의 머리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씩 하나씩 수집하고 싶은 책’으로 각인되었다.
아무리 표지가 예쁜 책도 내용이 공감되지 않으면 무겁다는 이유로 마다했던 해외에서의 책 쇼핑은 애술린을 만난 이후로 달라졌다. 그냥 책을 구경하러 가던 행위가 애술린을 만나러 가는 행위로 바뀌었다. 바쁜 출장 일정에서 서점에 들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이후 애술린을 자주 접하지 못했던 서운함이 컸는데 우리나라에 애술린 책을 구매할 수 있는 애술린 라운지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애술린을 국내에 들여온 차원이 다른 사람의 지적인 마케팅에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을 정도였다.
애술린은 읽는 책이 아니라 보는 책이다. 일일이 볼 수 없었던 랑방의 느낌이 있는 옷도 감상할 수 있고 오랜 시간의 아카이브를 담은 까르띠에와 시간여행을 할 수도 있다. 팝 아트 작품을 한곳에 모아놓은 작품집도 구경할 수 있고 유명 작가의 일러스트집도 훔쳐 볼 수 있다. 애술린 라운지에서 그윽한 향의 커피 한잔과 함께 애술린을 감상하는 지적 사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무게를 달아준다.
뉴욕 맨해튼 10번가와 11번가 사이 위치한 601빌딩. 이 건물 18층에 애술린의 헤드 오피스가 있다. 뉴욕 매거진이 “하이소사이어티의 완벽한 스타일을 출판물을 통해 구현하는 럭셔리 문화의 제국”이라고 극찬한 곳이다. 애술린은 샤넬, 루이뷔통, 크리스챤 디올, 카르티에, 해리 윈스턴, 돌체 앤 가바나, 베르사체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명품 브랜드가 브랜드 이미지를 소개하는 브랜드 책을 낼 때 유일하게 디자인과 출판을 의뢰하는 곳이 여기다. 근사한 디자인과 멋진 레이아웃, 고급스러운 제본은 물론 깜짝 놀랄 정도로 파격적인 북 케이스까지 제작해 내는 덕분에 애술린 책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명품 오브제”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유난희
명품 전문 쇼호스트, 저서 <명품 골라주는 여자>, <아름다운 독종이 프로로 성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