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bilier à la grecque

© Grand Bureau de Lalive de Jully, Château de Chantilly
© Grand Bureau de Lalive de Jully, Château de Chantilly

 

[아츠앤컬쳐] 프랑스 앤틱가구의 전성기인 18세기에 탄생한 이색적인 가구가 있다. 바로 그리스풍 앤틱가구이다. 루이 15세 집권 당시 출현한 그리스풍 앤틱가구는 어쩌면 루이 15세 가구에서 루이 16세 가구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슨 연유로 갑자기 프랑스에서 그리스풍의 가구가 생산되었을까? 가구이야기 자문위원인 앤틱 감정사 마담 파트리시아 르모니에(Madame Patricia Lemonnier)가 루이 15세 집권 당시 어떠한 배경에서 그리스풍 가구가 탄생하였는지 유래를 들려주었다.

© Bureau à la grecque
© Bureau à la grecque

복고풍 그리스 디자인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동경은 어쩌면 인류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보다. 우리가 과거에 중국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고, 요즘 서양문화에 우호적이듯 18세기 중반 프랑스의 상류사회에서는 그리스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는 당시 폼페이 발굴, 헤라클레네움 발견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1748년 폼페이 발굴로 광장, 목욕탕, 원형극장 등 상당수의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건축물의 벽화에서 당시 로마인들이 생활했던 모습을 재발견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그들이 사용하였던 가구 및 식기들 또한 당시의 디자인에 영감을 주었다. 아울러 서양의 역사를 보면 그리스와 로마문화는 유럽문화의 기원으로써 현재까지 뿌리 깊은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 Ange Laurent de Lalive de Jully
© Ange Laurent de Lalive de Jully

당시 고대문화 애호가들은 직접 이탈리아에 가서 폼페이 발굴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퐁파두르 부인은 남동생인 마리니(Marigny) 후작을 1749년에 이탈리아로 파견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문화부장관 정도에 해당하는 직분을 갖고 있었던 그는 로마에 가서 그곳의 앞선 문화와 예술을 관찰하여 프랑스로 들여오는 임무를 받은 것이다. 건축가인 수플로와 판화가인 코셍이 마리니 후작의 이탈리아 여정을 동반했다. 그들은 2년간 그곳에서 머물면서 건축과 미술을 중점적으로 그리스, 로마 문화를 답습해왔다고 할 수 있다.

판화가인 코셍(Cochin)은 루이 15세 당시 유행했던 덩굴무늬 장식에 너무 싫증 났다고 하면서 직선이 두드러지는 그리스풍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프랑스로 돌아온 세 명의 특사단은 프랑스 왕실과 상류층에 그리스풍 디자인을 들여왔고, 이는 이후 몇 년간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또한, 당시 루이 15세 가구의 디자인과 현격히 상반되는 그리스풍 가구는 마니아층에게 마치 루이 14세 가구에서 볼 수 있었던 무게감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것처럼 평가받았다.

© Grand Bureau de Lalive de Jully, Château de Chantilly
© Grand Bureau de Lalive de Jully, Château de Chantilly

신고전주의 흑단 목제 가구
가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원목이다. 다양한 목재 사용의 변천을 보면 당시의 유행뿐만 아니라 주변국가들과의 무역관계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루이 15세 집권 당시의 특징을 보면 흑단목재의 사용이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흑단목재가 새롭게 재조명 받는 계기가 바로 그리스풍 가구의 생산이다. 왕실의 고위직이었던 ‘랄리브 드 줄리(Lalive de July)’의 가구 컬렉션이다. 그는 폼페이 벽화의 가구들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을 요청하였다. 루이 15세 가구의 특징이었던 로코코 특유의 장식적인 성격과 파도 치는 듯한 곡선미와 상반되게 직선 라인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느낌을 간소화하였다. 참고로 현재 그의 가구는 프랑스에서 아주 아름다운 고성으로 알려진 샹티이성(Château de Chantilly)에 전시되어 있다.

디자인이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워지면서 브론즈를 활용하여 그리스풍의 모티브를 중간중간에 장식하여 고전주의를 재해석한 ‘네오클래식한 디자인’으로 거듭났다. 당시 새롭게 고안된 브론즈 장식 중에는 솔방울 모양을 들 수 있다. 더불어 그리스 신전의 기둥에 있는 도리아양식, 이오니아양식, 코린트양식에서 영감을 얻은 모티브들이 가구의 디자인에 많이 활용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복잡한 선은 배제하고 가구의 색감도 흑단으로 어둡게 하여 전체적으로 중후하면서도 간소한 느낌을 주는 가구가 탄생한 것이다.

© Grand Bureau de Lalive de Jully, Château de Chantilly
© Grand Bureau de Lalive de Jully, Château de Chantilly

앙주 로랑 드 랄리브 드 줄리
그렇다면, 프랑스에 그리스풍 가구의 디자인을 도입한 랄리브 드 줄리는 누구인가? 1725년 파리에서 태어나 1779년 파리에서 생을 마친 그는 전형적인 18세기 영향력 있는 금융계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예술품 컬렉터로 잘 알려져 있다. 실상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 이미 혁명 전부터 18세기 프랑스 사회에는 귀족들의 세력 못지않게 신흥 금융인들의 영향력이 현격히 부각되었다. 그들은 경제분야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과시했다. 귀족들의 취향이 섬세하고 고풍스러운 것을 추구한다면, 신흥 금융세력들은 좀 더 과감하게 자신들의 부를 드러내는 것을 선호했다. 신흥부유층의 이러한 럭셔리 취향은 어쩌면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프랑스 럭셔리 산업의 모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거액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랄리브 드 줄리는 1756년 베르사유 궁전에 요즘으로 비유하면 대사직위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다방면에 역량을 지닌 그는 문화예술에 대한 조예도 남달랐다고 한다. 이에 화가인 루이 조제프 르로렝(Louis Joseph Le Lorrain)과 함께 1754년부터 가구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현재 샹티이 고성에 전시되어 있는 유명한 그의 대형 책상, 일명 그랑 뷔로(Grand bureau)가 이 사업의 일환으로 1757년에 제작된 것이다.

실제로 일상에서 사용하기보다는 장식용으로 무게감을 과시하는 이 책상은 랄리브 드 줄리의 카리스마를 표현한 가구라고 볼 수 있다. 17세기에 주로 사용했던 직선 라인을 재도용하였으며, 그리스 건축에서 볼 수 있는 프리즈 장식을 사용하였다. 월계수 줄기 장식 및 간소화된 사자형상의 모티브도 볼 수 있다. 이 컬렉션은 전형적인 반로코코양식으로 어쩌면 혁명의 조짐을 예견한 가구라고도 할 수 있다.

글 | 이화행
아츠앤컬쳐 파리특파원, 아트 컨설턴트, 파리 예술경영에꼴 EAC 강사
소르본느대 미술사, EAC 예술경영 및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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