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잊기 위해서지, 53×33.5cm, 한지에 먹 금분, 2019
김지은, 잊기 위해서지, 53×33.5cm, 한지에 먹 금분, 2019

[아츠앤컬쳐] 사랑과 미움, 희망과 절망, 희열과 분노, 그리움, 두려움, 욕구, 갈망, 용기…. 인생은 참으로 많은 감정들이 혼합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일일이 드러내며 살진 못한다. 어쩌면 솔직한 감정을 숨겨야할 상황이 더 많기도 하다. 그러다보면 감정의 온도는 자연스럽게 식어가고 퇴화되어, 본래의 존재감도 희석되기 마련이다. 김지은의 작품은 ‘우리의 마음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단어들’을 찾아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내면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형체화시킨 것이다. 들춰보면 너무나 당연한 감정의 표현이고 언어들인데, 막상 그 말들을 얼마나 쓰고 있었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김지은 작가는 ‘내면의 감정언어로 소통하기’를 작품화했다.

김지은, 그냥 그 자리에, 95×95cm,한지에 먹 분채 자수, 2019
김지은, 그냥 그 자리에, 95×95cm,한지에 먹 분채 자수, 2019

“끊임없이 무질서하게 머리나 마음속에서 떠오르고 사그라진 감정들은 단어의 나열을 통해서 더욱더 혼란스러워지며, 나와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과 비슷한 형체를 갖춘다. 그들은 원시적 유기체마냥 군락지어 언어가 되고, 그 다양한 언어들은 사회를 투영하는 거울이 된다. 지난 수년간 작업과 병행하며 매진했던 스페인어와 영어 공부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필요성에서 시작된 취미는 아니었다. 무의식의 심연 속에
서 현실의 절망을 희망으로 보려는 몸부림에 가까웠던 나만의 연명이었다.”

김 작가의 말처럼, 그녀의 작품들은 무수히 펼쳐진 사회의 일상을 투영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텍스트의 유기적인 조합으로 삶의 희망과 영감들을 스케치하고 있는 셈이다. 언어를 배우거나 문학을 익히는 과정은 결국 넓게는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좁게는 개인 상호 간의 원활한 교감을 위한 것이다. 김지은의 시도는 사람들과의관계 맺기를 통해 삶의 완성도를 높여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때문에 텍스트 자체의 형상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텍스트 본연의 역할과 의미에 방점이 있다.

김지은, 그냥 그 자리에, 30×30cm, 한지에 먹, 분채 금분, 2019
김지은, 그냥 그 자리에, 30×30cm, 한지에 먹, 분채 금분, 2019

김지은의 작품에서 시각적으로 드러난 요소들 중 텍스트 외에도 중요한 비중이 더 있다. 우선 단순화된 형상들이다. 꽃송이나 와인 혹은 칵테일 잔 등이 그 주인공이다. 그것은 마치 다양한 일상생활을 표본적으로 캡처해서 보여주는 듯하다. 채집된 일상의 감정인 셈이다. 그렇게 모종(某種)의 텍스트는 일상의 파편과 만나 보다 풍성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의 완성도를 더 높여주는 요소가 있다. 바로 자수(刺繡)를 놓은 듯 발견되는 실뜸의 흔적들이 그것이다. 화면 전체를 골고루 채우거나, 단순화시킨 형상을 중심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이든 화면의 균형과 스토리텔링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이다.

“작업은 모든 것이 충돌하는 일상 오감의 통증 속에 지탱해준 나의 오롯한 삶이며, 이에 직간접적으로 교감하는 타인들의 그것이다. 관계를 통해 결핍을 경험하지만 또 관계를 통해 치유를 얻기도 하는 ‘삶의 아이러니와 희망의 단서를 찾아가는 수행 과정’이다. 작품을 통해 마음속 깊숙이 숨겨서 있는 단어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나의 내면을 형체화시키는 데 매력을 느낀다. 이 과정은 우리가 삶에서 타인과 혹은 나와의 관계를 맺어 나아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김지은, 그냥 그 자리에, 95×95cm,한지에 먹 분채 자수, 2019
김지은, 그냥 그 자리에, 95×95cm,한지에 먹 분채 자수, 2019

화폭을 수없이 가로지르는 반복적인 글쓰기와 바느질 작업을 통해 김지은 작가는 자신과 스스로 관계 맺기를 완성해가는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로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과정은 의외로 간단하다. 평소 독서하며 메모해 두었던 책의 구절이나 단어들을 두꺼운 삼합장지나 배접된 삼베(혹은 광목천) 위에 먹으로 써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글을 쓰는 도구는 중요하지 않다. 일반 붓이 될 수도 있고 끝을 뾰족하게 만든 나뭇가지일 수도 있다. 써놓은 글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연한 분채 색감을 십여 번 중첩시켜 올린다. 그리곤 경우에 따라 일정한 패턴의 바늘땀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일정한 속도감의 유지이다. 단어나 문장은 감정의 표현이지만, 정작 고요한 평정심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것은 수행자의 삶과 많이 닮은 작업방식이다.

김지은 작가의 작품은 이번 달 8일까지 서울 서촌의 팔레드서울에서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이번 아홉 번째 개인전 이후에도 레지나 갤러리 후원으로 서울 인사동의 서머셋팰리스호텔에서 9월 10일부터 12월 12일까지 3개월간 전시가 이어진다. 특히 전시 중에 발생되는 작품 판매 수익금의 일부는 연말 크리스마스시즌에 레지나갤러리와 함께 저소득층 가정의 어린이들에게 미술재료를 선물해주는데 사용할 예정이라니 더욱 뜻 깊다.

김지은, 그냥 그 자리에, 95×95cm,한지에 먹 분채 자수, 2019
김지은, 그냥 그 자리에, 95×95cm,한지에 먹 분채 자수, 2019

작가소개 | 김지은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9회의 개인전과 수십 회의 기획단체전에 참여했다. 또한 아트부산, 어포더블아트페어 홍콩 등 12회의 국제 아트페어에 초대되었다. 2000~2016 부산과학기술대학 공간디자인학부 패션연출디자인과 부교수와 2013~2014 (사)한국직업연구진흥원 직업연구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작품은 부산 북부경찰서, 부산 아르피나 유스호스텔, 부산 해동병원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는 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다.

필자소개 | 김윤섭
미술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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