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붉은 광장
모스크바 붉은 광장

[아츠앤컬쳐]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러시아를 가리켜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의 나라’라고 했다. 현재의 러시아는 중세기 이전 고대에 ‘루스’라 불리던 바이킹이 세운 공국들 중 키예프 공국, 신흥 모스크바 공국으로 성장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모스크바 공국은 흑해와 카스피해에 원천을 둔 드네프르강과 돈강 그리고 볼가강을 따라 성장해 나갔고 최전성기에는 세인트피터즈버그부터 알래스카까지 이어지는, 세계 대륙 육분의 일을 차지하는 대국을 건설했다. 전혀 다른 언어를 가진 민족들이 합쳐져 단일 국가로 성장해 나간 형태였다.

모스크바 공국 이전에는 가장 강한 공국이었던 키예프 공국이 먼저 세력을 확장했는데, 키예프 공국을 넘어 제국으로 성장시키고 싶었던 블라디미르 왕은 동로마 제국 정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플까지 사신을 보내 정교회를 받아들이며 종교로써 러시아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어렵게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던 러시아지만 한때는 징기스칸의 공격으로 3년 만에 온 나라가 정복당하기도 했다. 동방에서 갑자기 나타난 징기스칸의 군대는 가장 강력했던 키예프 공국조차도 폐허로 만들며 멸망시켰다.

이때부터 서양 사람들은 몽골인과 투르크인으로 구성된 나라를 ‘타타르’라고 불렀다. 몽골은 이후 러시아를 정치적으로 지배하기보다 여러 공국들로부터 조공을 받기 원했다. 당시 러시아의 왕자들은 왕이 되려고 타타르로 건너가 타타르군의 말을 키우는 하찮은 일을 했을 정도였다.

모스크바 대공 이반1세는 러시아 공국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획득해 ‘칼리파(돈주머니)’라는 별칭을 갖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모스크바 공국은 자금이 풍부해지고 강한 군대를 갖게 되어 결국 새로운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가 지휘한 돈강에서의 전쟁을 시작으로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1480년 이반3세에 이르러 몽골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한편 이반 3세는 1453년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 멸망한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을 모스크바로 가져와 세운 인물이다. 비잔틴의 상징이었던 쌍독수리 문장을 가져왔고 동로마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 ‘조엘’을 아내로 맞아 혈통까지 동로마와 합쳤다. 차르라는 이름도 왕비의 조언에 따라 비잔틴의 황제 호칭인 시저에서 가져왔다.

이후 이반4세는 1547년 러시아 제국의 공식적 ‘차르’라는 이름의 독재적 황제 권력을 잡기까지 주변 귀족들을 차례차례 반역죄로 숙청해 나갔다. 그리고 카스피해로 이어지는 볼가강의 교역로를 쥐고 있던 몽골족 타타르의 카잔을 정복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크렘린 궁에 지금 러시아의 랜드마크인 성 바실리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대화재 후 아내까지 잃어버리는 충격으로 차르 이반4세는 미쳐가기 시작했고 스페인식 종교재판관과 같은 친위대를 만들어 자신에 대항하는 귀족들과 반대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광기로 인해 그는 말다툼 끝에 자신의 아들을 칼로 내리쳐 죽이기까지 했다. 1571년 이반4세의 폭정으로 러시아가 약해진 틈을 타고 ‘타타르’인들이 침공해 3시간 만에 모스크바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일로 모스크바의 인구가 전성기의 20%까지 줄어들었고, 엉뚱하게 신비주의에 빠진 차르는 점성술사에게 1584년 3월 18일 자신의 죽는 날짜까지 받아놓은 후 거짓말처럼 그날 급사했다.

이후 제국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1600년대 초 기근, 가난, 전염병이 창궐하며 ‘고난의 시대’라 불리는 암흑의 10년이 시작된다. 이때 정치적으로도 ‘표트르 이바노비치’, ‘보리스 고두노프’(푸시킨의 소설, 이후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로 만들어짐), ‘표도르 고두노프’, ‘바실리 스위스키’ 등 6명의 왕이 권력을 잡고 또 살해되는 격변의 시기를 겪는다.

한번은 폴란드에서 온 한 사기꾼이 등장해 1년간 왕이 되기까지 했다. 국경을 맞대고 있던 폴란드의 왕도 이런 혼란의 틈을 타 모스크바까지 쳐들어와 러시아 정교회 대주교를 감옥에 가두고 러시아의 왕이 되고자 했는데, 이때 러시아를 구한 것은 러시아 각지에서 일어난 민병대였다. 폴란드군을 물리친 백성들은 이후 이반4세의 먼 친척 ‘미하일 표도르비치 로마노프’를 수도원에서 찾아내 1623년 차르로 등극시켰다.

이렇게 로마노프라는 이름으로 300년을 이어가는 왕조가 시작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드라마틱한 등극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은 이후 보상을 받았다. 그중 1619년 러시아에 데레비스키(Derevischi)라는 마을 땅의 절반을 차르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보그단 소비닌(Bogdan Sobinin)이라는 군인이 있는데 그의 장인은 평범한 농부였으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군인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차르의 행방을 말하지 않아 차르의 목숨을 구한 일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반 수사닌(Ivan Susanin)’. 그는 19세기 초, 니콜라이1세 시절 국가의 공식적인 영웅으로 승격되었고 그를 위한 시와 오페라들이 만들어졌다.

1836년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가 4막에 에필로그를 붙인 형태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바로 이 오페라 <차르에게 바친 목숨(이반 수사닌, 1836년 12월 9일 세인트 피터스버그 마린스키 극장 초연)>을 시작으로 글린카는 ‘러시아 오페라의 아버지’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처세술이 뛰어났던 글린카는 공연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차르 니콜라이1세가 리허설을 보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오페라의 제목을 <이반 수사닌>에서 <차르에게 바친 목숨>으로 급하게 변경 했다고 한다.

오페라의 내용은 간단하다. 1612년부터 1년 사이 러시아를 침략한 폴란드군이 수사닌에게 차르의 행방을 묻는다. 러시아 작은 마을 돔니노의 농부인 수사닌은 침략자들을 엉뚱한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숲속 늪지대로 안내한다. 수사닌의 속임수를 알아차린 폴란드군은 그를 죽여버리지만, 매복하고 있던 수사닌의 사위가 될 보그단 소비닌이 이끄는 러시아 군대가 결과적으로 폴란드군을 몰살한다. 이렇게 수사닌의 희생으로 차르는 무사히 구출되어 모스크바에서 무사히 대관식을 치른다. 그리고 수사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인 에필로그를 끝으로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이반 수사닌의 이야기는 글린카의 오페라 이전 1815년에 카테리노 카보스(Catterino Cavos)의 작품으로 한차례 발표된 적이 있었다. 당시 11세의 글린카는 해피엔딩의 이 오페라를 보았으나 큰 감흥은 없었다고 한다.

이반 수사닌은 데카브리스트* 당원 중 귀족 출신의 영웅 서사시를 쓰던 시인 콘드라티 릴레이예프(Kondraty Rileyev, 1825년 12월 14일 반차르 운동의 지도자로서 체포되어 차르 명령으로 사형됨)에 의해 러시아 민중의 독립에 있어서 상징적 인물로 그려졌으니, 이반 수사닌은 적대적인 두 세력으로부터 모두 영웅시되었던 아이러니의 대표적인 예이다. 영웅 이반 수사닌의 이야기는 시대의 흐름을 지나며 또다시 변화를 겪는다.

20세기 초 차르 니콜라이2세가 지배하던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이 시작되면서 오페라의 제목도 다시 <이반 수사닌>으로 바뀌고 대본도 많은 수정을 거친다. 1838년 니콜라이1세가 세운 ‘이반 수사닌’의 기념비도 차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철거되었고 전혀 새로운 기념비를 다시 세우는 해프닝이 있었다.

현재 이반 수사닌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는 아직도 그 원류와 진위에 관해 시대와 장소 등이 황제의 권력 강화를 위한 도구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 러시아 황제 차르 니콜라이1세에게 서구식 헌법제정을 요구하던 반 차르 군인조직, ‘12월당’이라고 함.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졸업, 영국 왕립음악원(RSAMD) 오페라 석사
영국 왕립음악대학(RNCM) 성악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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