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부터 서초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수요 오페라’ 연속공연을 이어가면서 오랜만에 <라 트라비아타>를 준비하게 되었다. <라 트라비아타>(1853)는 세계 오페라 공연 횟수 1위 자리를 수년간 지키고 있는 부동의 베스트셀러이다. 또한 그 인기만큼 오페라 공연 외에도 수많은 영화에 영감을 주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비올렛타와 비슷한 듯 다른 운명의 여인 비비안(줄리아 로버츠役)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그린 영화 <귀여운 여인>(1990)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영화 <귀여운 여인>은 거장 게리 마셜 감독이 오랜 준비 끝에 지난 2018년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로 선보였다. 대본을 맡은 게리 마셜 감독은 2016년 공연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으나, 토니상과 그래미상을 수상한 제리 미첼이 연출과 안무를 맡고, 역시 그래미상을 수상한 가수 브라이언 아담스가 음악을 맡는 등 뮤지컬 <귀여운 여인>은 큰 관심을 모았다.
<귀여운 여인>은 개봉 당시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의 영화였는데 키가 컸던 필자는 자랑은 아니지만 입장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성악을 갓 시작했던 때라 비록 정확한 이름도 몰랐지만 오페라 장면을 보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페라글라스와 씨름하던 비비안에게에드워드(리처드 기어役)가 사용법을 알려주던 장면, 오케스트라를 밴드라고 부르며 하는 말마다 주변 사람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어휘를 쓰면서도 작품의 감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 흘리는 비비안,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에드워드. 어린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긴 장면들이다.
큰 성공을 이룬 영화이니만큼 뒷이야기도 풍성하다. 비비안 역은 당시 로맨틱 코미디 분야를 휩쓸던 스타 멕 라이언, 사라 제시카 파커, 몰리 링월드 등에게 제안됐다고 한다. 하지만 거리의 여자 역에 부담을 느낀 그들이 모두 거절하여 비비안 역은 무명의 줄리아 로버츠에게 돌아갔고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엄청난 성공으로 이어졌기에 먼저 제안받았던 배우들은 후회의 인터뷰들을 남겼다.
비비안이 명품거리를 누비며 쇼핑을 즐기는 장면은 LA의 베벌리힐스 지역 로데오 드라이브에서 일요일에 촬영했는데, 캘리포니아에서 유명지역은 엄격한 촬영 규율 때문에 일요일에만 촬영이 가능했다고 한다. 오페라에 가기 위해 드레스를 차려입은 비비안이 아마도 그녀 인생에 다시 없을 황홀한 목걸이가 든 상자를 만지다 데이비드의 장난에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리처드 기어의 애드립이었으나 모든 스태프의 반응이 좋아 살린 장면이며, 목걸이는 당시 물가로서 어마어마한 가격인 25만 달러였기 때문에 촬영 내내 무장 경호원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남자 주인공 리처드 기어는 실제로 작곡도 할 수 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기에 피아노 연주 장면을 대역 없이 직접 연기했고 실제 연주했던 곡도 직접 작곡한 곡이었다. 그런 능력자 리처드 기어도 에드워드 역을 맨 처음 제안받은 배우가 아니었다. 1순위는 놀랍게도 권투 영화 <록키>(1976)의 주인공 실베스터 스텔론이었다고 한다. 존 트라볼타도 오디션을 보았고 덴젤 워싱턴도 물망에 올랐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리처드 기어가 아닌 에드워드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가장 놀라운 것은 촬영 당시 41살이던 리처드 기어와 23살이던 줄리아 로버츠의 호흡이 너무나 잘 맞았다는 것이다. 무려 18살 차이가 났는데 말이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데 마지막 장면에 사용된 음악은 오페라 상에서 남자를 사랑하지만 보내야만 하는 여자의 이별 장면 음악이다. <라 트라비아타>의 가장 드라마틱한 사랑의 외침이어서 그랬을까.
영화의 결말과 달리 오페라는 비극으로 끝난다. 지병이 있던 비올렛타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데, 유복한 가정의 남자와 사교계의 꽃인 여자의 이루지 못한 사랑은 관객들의 눈물을 쏟게
한다.
이 사랑의 걸림돌은 남자 주인공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다. 제르몽은 아들 모르게 비올렛타를 찾아가 그녀와 알프레도의 처지가 다름을 말하며 떠나줄 것을 요구한다. 비올렛타는 자존심이 강한 여인이기에 달랑 편지 한 장 남기고 파리로 훌쩍 떠나버린다. 알프레도는 그녀의 지난 삶에 비추어 볼 때 새 남자가 생겼음을 확신하고 파리로 쫓아가 그녀의 파티에서 난동을 피운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이 나고 비올렛타는 병이 깊어져 사교계와 멀어지며 허름한 집에서 궁색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녀의 병은 나날이 깊어져 이젠 창문 밖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에 위로를 받을 정도다. 그리고 알프레도는 죽음을 코앞에 둔 비올렛타를 찾아와 자신의 사려 깊지 못함에 용서를 구하고 파리로 다시 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남녀의 사랑은 언제나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같다. 상대방이 나를 진짜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계속 확인하고 시험한다. 때로는 안심하고 때로는 불안해하면서.
바야흐로 우리는 불신과 의심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물리적 폭력은 줄었을지 모르나 정신을 피폐하게 하는 말의 홍수를 피부로 느끼는 요즘이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인류의 생활 방식을 전격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인류에게 미칠 변화의 충격에 대비해야 한다던 4차 산업 시대 속으로 우리는 갑자기 던져졌다. 생존을 위해 강제로 시작된 언택트 시대에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또 어떻게 적응할까. 역사적으로 죽음의 공포가 인간의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아직 21세기의 인간에게는 너무 낯선 세상이다.
최근 근 30년 만에 대학 동기와 나눈 장시간의 이야기가 바로 코로나 이후 클래식 예술가들은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한국에 들어와 곧바로 교수 생활을 시작한 동기는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면서 느낀 바를 전하며 아이디어와 비전을 나누었다.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하며 역시 인간이 마주 앉아야 이야기가 앞으로 진행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길을 가게 될까? 최근 붐이 일고 있는 트로트 공연을 제외하고 우울한 공연시장에서 허약 체질의 클래식 공연계는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공연의 최전선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기획자들은 그 어느 때 보다 치열하게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결과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부디 비올렛타의 죽음이 아닌 비비안의 해피엔딩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글 | 신금호
'오페라로 사치하라' 저자, 성악가, 오페라 연출가, M cultures 대표
www.mculture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