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어릴 적 스파이 영화란 007시리즈와 동의어였다. 당시 스파이 혹은 비밀 첩보요원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는 ‘마초적 멋짐’이었다. 제임스 본드는 지금 생각해보면 중2병에 다름없는 허세 덩어리이다.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비밀 첩보요원이면서 항상 본명을 쓰고, 애스턴마틴이나 벤틀리 같은 슈퍼카를 타고 다닌다. 거기에 어떤 미녀든 3분 안에 유혹할 수 있는 마성적 매력과 초과학적 무기를 장착하고 살인면허라는 초법적 권한을 휘두른다. 적들도 당연히 보통 사람은 아니었는데, 대부분 엄청난 부와 기술력을 가진 과대망상 사이코패스들로 목표는 세계 정복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스파이 영화들은 다양한 변주를 시작한다. 그 첫 번째는 스파이의 ‘올바른 태도’를 보여준 <제이슨 본>시리즈였다. 전투력만 놓고 보면 엄청난 능력자지만, ‘관종’인 본드들과 달리 제이슨 본은 어떻게든 자신을 존재를 숨기려 한다. 기름기를 쏙 뺀 하드코어 첩보요원들이 성공하자 원조격인 007시리즈가 이들을 역벤치마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카지노 로얄>과 <스카이폴>에서 최강 전투머신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여 시리즈 역사상 가장 큰 흥행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두 번째 변주는 코미디와의 결합이었다. 마이크 마이어스의 <오스틴 파워>, <미스터 빈>으로 친숙한 로왓 앳킨슨의 <쟈니 잉글리시>, 멀리사 매카시의 <스파이> 등이 대표작인데, 이들은 007을 패러디 하면서 그 특유의 허세를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2015년 개봉한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는 007시리즈의 ‘멋짐’과 제이슨 본의 ‘하드코어 액션’, 코미디 스파이물의 ‘병맛’을 버무려 엄청난 성공을 거두는데, 이 영화의 대사들은 이러한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초간단 줄거리: 영국 비밀 첩보 조직 킹스맨의 최정예 요원 해리(콜린 퍼스)는 대신 목숨을 잃은 동료의 아들인 에그시(태론 에저튼)를 스파이로 키운다. 이들의 적은 IT 천재 재벌 리치몬드 발렌타인(새뮤엘 잭슨)인데, 그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인류 중 상당수를 말살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해리와 발렌타인은 첫 만남에서 “요즘 스파이 영화는 너무 심각해서 싫다”며 과거 젠틀맨 스파이와 과대망상 악당들에 대한 로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해리는 에그시에게 킹스맨 요원들의 활동은 절대 음지를 지향한다며 자신이 세상을 구했던 날들의-킹스맨 활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사들로 채워진-신문들을 보여준다. 에그시는 훈련 파트너인 자신의 개 이름을 JB로 짓는데, 이는 제임스 본드, 제이슨 본뿐 아니라 <24>의 잭 바우어의 약자까지 될 수 있다는 힌트를 준다.

뿐만 아니라 <킹스맨> 주인공 에그시는 매우 인간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 제임스 본드를 비롯한 스파이들은 대부분 소시오패스로 묘사된 반면, 에그시는 애완견을 죽이라는 미션을 수행하지 못해 에이전트 시험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2편에서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해도 되는지 애인에게 물어볼 정도로 인간적인(세계평화를 지키는 스파이로서는 다소 답답한) 모습을 보여준다.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의 ‘멋짐’은 영국이 가진 문화적 자산에 기대는 바가 컸는데, <킹스맨>시리즈는 이런 문화 아이콘을 아예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도 흥미롭다. 영화 속 ‘킹스맨’은 1840년대부터 활동하던 영국 재단사들이 왕과 귀족들을 위해 만든 비밀 첩보 조직이며, 이들의 본부는 ‘킹스맨’ 테일러샵이다. 해리는 에그시에게 “(영국식) 수트는 현대 신사들의 갑옷”이며 “킹스맨 요원들은 (그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라고 가르친다.

시리즈 2편인 <킹스맨:골든 써클>에서는 미국 자매 기관인 ‘스테이츠맨’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태생은 위스키 양조장이며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다닌다. 영국 ‘킹스맨’ 해리의 무기는 우산이고, 미국 ‘스테이츠맨’ 위스키의 무기는 카우보이 채찍이다. 물론 이들 모두 최첨단 기술을 장착하고 있다.

9월 말 개봉하는 속편 <킹스맨: 골든 써클>은 1편이 보여준 새로움은 다소 식상할 수 있겠지만 병맛이나 액션 및 잔인함의 강도는 훨씬 더 세졌다. 거기에 정도로 약물 중독 등 사회적 이슈와 현실 정치, 집단 이기주의 등 현실 정치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를 가미한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2편에 등장하는 미국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도널드 트럼프를 떠올리게 하는데, 결국 그는 탄핵되고 만다.)

제작사인 20세기폭스는 이후 킹스맨을 새로운 스파이 유니버스로 확장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으며, 미국 ‘스테이츠맨’ 요원 데킬라(채닝 테이텀)를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와 성룡이 출연할지도 모르는 중국 배경의 ‘엠퍼러맨’ 등 원대한 계획을 진행 중이다. 각 국가의 대표적 문화 산업들이 실은 비밀 첩보조직으로 서로 얽혀있을지 모른다는 흥미로운 상상이다. 여기서 쓸모없는 궁금증 하나는 만약 대한민국 비밀 첩보조직이 나온다면 그들의 문화 상품은 무엇이며,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던질까 하는 점이다. (물론, 아직 이런 논의는 진행된 바 없다.)

글 | 도영진
이십세기폭스 홈엔터테인먼트 코리아 대표, CJ E&M 전략기획담당 상무 역임
보스턴컨설팅그룹 이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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