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순간에 우정은 빛이 난다
[아츠앤컬쳐] 실크로 된 옷은 입기에 조심스럽다. 더러워지면 꼭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 하고 보관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므로 비단은 아름답고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조심스럽고 어려운 옷감이다. 하지만 무명은 질기고 편하고 무난하다. 세탁도 집에서 편하게 할 수 있고 보관도 손쉽게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매혹의 비단과 편한 평화의 무명… 이 중에 참된 우정은 어떤 쪽일까?
하루 24시간 아무 시간이나 전화해도 흉이 안 되고, 내 부끄러운 마음을 언제나 들켜도 좋고, 설령 다퉈서 말을 안 하는 상황이 되어도 얼른 다시 만나면 툭툭 털어버릴 수 있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이해하는 친구… 그런 무명 같은 친구가 정말 내 친구는 아닐까?
신화 속에는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가 등장한다. 바로 여기서 ‘멘토’라는 단어가 나왔다. 멘토는, 자신의 꿈이나 인생,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지혜와 기술을 깨우칠 수 있게 도와주는 선배를 뜻한다.
멘토르 이야기를 하려면 트로이 전쟁을 언급해야 한다. 제우스와 레다의 딸인 헬레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구혼자들이 몰려들었는데, 대부분 권력가들이었다. 헬레네의 부모는, 혹시 그들 중에 누군가가 선택이 안되면 보복하는 건 아닐까 고민이 됐다. 그래서 선택하기 전에 조건을 달아두었다. 누가 헬레네와 결혼하든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위해 애써 줄 것을 맹세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그 요구에 응했고, 헬레네의 남편이 될 사람을 위해 힘을 합하기로 맹세했다. 그때 헬레네는 메넬라우스와 결혼했고 스파르타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이 구혼자들이 맹세를 지킬 기회가 왔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해간 것이다. 메넬라우스는 곧바로 헬레네의 구혼자들이었던 그리스의 여러 왕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아내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때 두 사람만이 그의 요청을 거부했는데, 한 사람은 오디세우스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아킬레우스였다.
오디세우스는 연로한 아버지와 막 태어난 아들 텔레마쿠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를 두고 전쟁터에 나가는 게 싫었다. 부정한 여자 헬레네를 위해 그런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궁리 끝에 실성한 척했다. 메넬라우스의 사절단이 왔을 때 미쳤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귀와 황소를 매고 미친 척 웃으며 씨 대신 소금을 뿌려댔다. 미친 연기는 꽤나 그럴듯했다.
그러나 곧 들통 나고 말았다. 사절단 중 한 사람이 오디세우스의 어린 아들을 데려다가 밭고랑에 놓았다. 차마 아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던 오디세우스는 쟁기를 옆으로 비켜 아들을 보호했다. 그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렇게 발각되고 말았고 그는 할 수 없이 예전에 했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떼어 전쟁터에 나가야 했던 오디세우스는, 그의 오랜 친구인 멘토르를 찾아갔다. 그에게 갓난아기인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과 후원을 부탁했다.
“내 친구 멘토르. 자네만 믿네. 나 대신 내 아들을 잘 가르쳐주게. 그리고 후원해주게.”
멘토르는 오디세우스의 부탁을 듣고 그의 아들을 극진히 보살폈다. 트로이 전쟁 10년, 귀환 10년, 도합 20년이 걸린 오디세우스의 귀향이 막을 내릴 때까지 그는 충실하게 텔레마코스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선생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때로는 상담자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아버지 노릇도 기꺼이 맡았다.
그 후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성실하게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주는 지도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멘토로부터 지도와 조언을 받는 사람을 ‘멘티(Mentee)’라고 한다. 교육학에서 1:1 교육을 뜻하는 ‘멘토링(Mentoring)’도 멘토르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진정한 친구를 가리켜 ‘아킵(Akib)’이라고 했다.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도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친구’와 ‘행운’이 같은 의미였다.
지금도 우정은 여전히 중요한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신에 대해 얘기할 때에도 ‘우리의 친구’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진정한 친구는 내 가슴의 가장 깊은 곳까지 놀
라운 기쁨과 달콤한 행복을 선사해준다.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흔들림 없는 우정은 우리의 가슴을 보다 넓고 너그럽게 만들어준다. 하루에 한 번씩 늘 만난다고 친구는 아니다. 일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고 친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는 마음으로 보인다. 눈을 감으면 더 또렷해지는 얼굴, 그가 진정한 친구다.
친구를 만나면 아무 말 없이 그저 앉아있어도 마음 든든하다. 친구를 생각하면 만나지 않아도 그가 나를 위로하는 손길이 느껴지고 그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만져진다. 진정한 친구는 어디로 절대 떠나지 않는다. 망망대해 속에 떠 있는 섬처럼 먼바다를 헤엄쳐 가다가 쉴 수 있는 그곳에 늘 있어준다.
친구는 내가 잘 나갈 때 나를 추켜올려 내 어깨를 세워주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꾸짖어 겸손하게 한다. 친구는 내가 쓰러질 때 다가와서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내 어깨를 두드려준다. 비가 올 때면 친구는 우산이 없는 나를 위해 기꺼이 자기 우산도 던져버린다. 그리고 무거운 내 짐을 그의 등에 얹고 먼 길을 동행해 준다. 그런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세상 제일가는 부자다.
글 | 송정림 방송작가·소설가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 1,2,3>, <내 인생의 화양연화>, <신화처럼 울고 신화처럼 사랑하라>, <사랑하는 이의 부탁>, <감동의 습관>, <명작에게 길을 묻다>, <영화처럼 사랑을 요리하다>, <성장비타민>, <마음풍경> 등의 책을 썼고 <미쓰 아줌마>, <녹색마차>, <약속>, <너와 나의 노래>, <성장느낌 18세> 등의 드라마와 <출발 FM과 함께>, <세상의 모든 음악> 등의 방송을 집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