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누군가의 비밀스런 공간에 초대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고 사랑하는 명화(名畵)가 탄생한 유명화가의 화실이라면? 남경민 작가는 그 기분 좋은 상상을 그림으로 옮겼다. 간혹 작품제목에 ‘초대받은 N-○○○ 화방을 거닐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N’은 작가이름의 대표 이니셜이고, ‘거닐다’라는 표현은 아마도 그만큼 초대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렸다는 표현일 것이다.
최근 신작 한 점을 들여다보자. 아직 켜져 있는 촛불과 중앙에 놓인 방석에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인 것을 보면, 좀 전까지 누군가 머물렀던 듯하다. 그 앞의 두루마리 한지엔 방금 완성한 멋들어진 초충도(草蟲圖)가 보인다. 보라색이 매력적인 한 쌍의 가지 주변엔 장수(長壽)를 상징하듯 금실 좋은 나비 한 쌍과 호기심 많은 방아깨비도 들렀다. 방석을 중심으로 펼쳐진 방안 풍경도 흥미롭다. 서탁에 가지런히 놓인 붓들과 책자의 표지, 손이 닿는 지척의 어여쁜 경대(鏡臺), 그림 속의 가지 색과 ‘깔맞춤’한 왼편의 보라색 커튼장식 등으로 보아 이 방의 주인공은 분명 여성임에 틀림없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장면은 뒤편 벽면거울에 비친 정경이다. 입체파를 탄생시킨 사과가 놓인 정물,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인 2,800억원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그림, 창밖으로 우뚝 솟은 생 빅투아르 산 등 후기인상파의 대가 폴 세잔(1839~1906)의 작업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세잔이 지금 보고 있는 책이 다름 아닌 우리 신사임당(1504~1551)의 초충도 화집이 아닌가. 굳이 따지자면 둘은 무려 335년의 나이 차가 있으니 어색할 것은 없지만, 서양미술의 대가가 탐독하는 화집의 주인공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여성화가라는 점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살펴본 작품 <신사임당의 화방>처럼, 남경민의 그림은 동서고금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가장위대한 화가들을 상징하는 명장면들을 오마주(Hommage) 하고 있다. 특히 관련 문헌자료 등을 통해 주인공의 성격이나 주변 환경까지 고증해 옮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짜임새와 완성도 높은 그림은 섬세한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그 빛을 발한다. 단순히 소품들을 통한 화면구성을 넘어 제각각의 은유적인 상징성을 가미시켜, 마치 작가 내면의 심리적인 감성까지 스캔한 듯 생동감 넘치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남경민식 화방’이다.
아마도 앙리 마티스ㆍ데이비드 호크니ㆍ폴 세잔 등 서양 미술사 거장들의 아뜰리에를 재구성한 전작들에 비해, 사료(史料)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한국 전통회화 대가들의 작업공간을 옮긴 최근 신작들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오로지 ‘작가적 상상력’이 그 진가를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겸재정선ㆍ단원김홍도ㆍ혜원신윤복ㆍ신사임당 등의 화실을 재현하면서 조선시대 왕과의 관계, 당시의 건축 공간적 특징, 시대적 사상과 배경 등의 다양한 요소까지 표현하고 있어서 보는 재미와 읽는 재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주고 있다.
“나의 그림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한다. 마치 서양의 화가 작업실 시리즈에서 보여주었듯, 고흐와 현재 생존화가인 데이비드 호크니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듯이 말이다. 자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우리 선대 대가들의 화방 풍경은 나만의 상상 속에서 오히려 더욱 자유로웠다. 예를 들어 화가 김홍도가 그의 작업을 통해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었던 정조시대의 르네상스 시대의 향기를 느끼고 싶고, 신윤복이 작업하던 현존의 풍경, 그 화방을 보길 원한다. 보고자하는 풍경은 거울과 캔버스의 틀을 통해, 창밖의 풍경을 통해, 가려진 커튼과 열려진 문틈사이로 그려지며 그것은 그림 안에서 관계를 맺으며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는 또 다른 풍경이 된다.”
비록 작가적 상상력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구현된 화가들의 작업실이지만, 남경민 자신의 개인적 소망이 은유적으로 담긴 소재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작가가 즐겨 등장시키는 소재 중 백합은 ‘회화의 진정성과 순수함’, 스노우볼은 다양한 ‘여행의 추억’, 붓과 물감은 ‘화가의 자존감’, 병에 든 날개는 ‘꿈을 펼치지 못한 예술가들의 영혼이자 희망’, 해골은 ‘죽음과 숙명적인 조우 또는 유한성’, 나비떼는 ‘현실과 이상을 이어주고 메신저’ 등으로 볼 수 있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이 기물들은 화가로서의 자아성찰을 넘어 관객과의 폭넓은 교감에 이르게 해주는 키워드인 셈이다.
작가 | 남경민(1969~) 작가는 덕성여대 예술대학 학부와 동 대학원의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그동안 2014 풍경 속에 머물다(사비나미술관), 2010 풍경을 거닐다(갤러리 현대 강남), 2006 남경민전(영은미술관) 등 9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2006 송은미술대상전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14 한국현대회화 33인전(서울 강동아트센터), 2013 house&home:나를 찾다(제주도립미술관), 코리아 투모로우(서울 예술의전당), 2012 회화의 예술(서울 학고재), 토포스-은유의 장소(경기도 남양주 모란미술관), 브레인-뇌 안의 나(서울 사비나미술관), 2011 나비의 꿈(광주시립미술관) 등 주목할 만한 기획전에 참여했다. 주요 작품소장처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사비나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영은미술관, 송은문화재단, 제주도립미술관, BMW 서울, 로얄&컴퍼니㈜ 등이 있다.
글 ㅣ 김윤섭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수료. 현재 미술평론가로서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이사 및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 및 서울시 공공미술 심의위원,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