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현대미술의 표현기법에서 가장 편리하게 많이 애용되는 도구는 무엇일까? 단연 컴퓨터이다. 아마도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시절에 컴퓨터가 있었다면, 그 거장들도 컴퓨터를 애용했을 것이다. 그만큼 현대사회 전반에 컴퓨터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아이템이다. 미술 영역에서도 컴퓨터 기술의 쓰임은 매우 다양해서 이루 표현을 다 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중에서 오프라인의 필기구로는 표현이 어려운 초정밀 기하학적 묘사나 화면구성, 미세한 색감변화의 구사 등은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다면 제법 수월해질 수 있다.
차보리 작가는 바로 컴퓨터가 지닌 이러한 장점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경우이다. 차보리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ㅜ‘옵스쿠라(obscura)’ 개념이다. 흔히 사진기 관련 용어로 쓰이는 이 단어는 ‘1)어둠상자, 2)암실, 3)주름상자’ 정도로 해석된다. 옵스쿠라는 사진이 제작되는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19C 초반 화가의 그림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사진기의 등장은 너무나 신기한 발명품이었다. 이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는 ‘광학적 속성을 극대화시킨 쾌거’인 셈이다. 이를 통해 대부분의 예술가들에게 큰 과제였던 ‘좀 더 사실적인 묘사와 원근법의 착시효과’의 표현이 가능해졌다. 사실 이런 시도는 카메라 발명 훨씬 이전인 BC 4C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먼저 했다고 한다.
차보리 작가의 작품 제작원리 역시 ‘어두운 상자(옵스쿠라)의 한쪽 벽에 바늘구멍을 내고 들어오는 빛이 방의 바깥쪽 세상의 다양한 장면과 현상들을 맞은편 벽면에 거꾸로 상(像)을 맺히게 하는 원리’를 컴퓨터로 표현한 것이다. 기본적인 작품구상은 오프라인에서 스케치 형식으로 시작하지만,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컴퓨터의 정밀한 기술을 이용하고, 시각화 된 이미지는 회화 혹은 사진작품처럼 캔버스나 디아섹(Diasec, 아크릴압축액자)으로 ‘단 한 점씩’만 제작된다. 가상(가짜)의 옵스쿠라 공간 안에 여러 가지 이미지가 연출되지만, 그것들은 실존(實存)과 실재(實在)의 미묘한 경계, 분명히 있긴 한데 실체로서 확인할 수는 없는 차이를 보여준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영향으로 사진ㆍ아우라ㆍ카메라 옵스쿠라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막연하게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일어나는 ‘경계의 사건’들을 알고 싶고, 시각화하고 싶었죠. 이런 호기심이 작업의 출발점이자 모티브입니다. 끝없이 확산되는 ‘격자 형식의 무늬’ 그리드(Grid) 위에서 반복ㆍ모방의 연속은 곧 ‘무의식 속에서 윤회를 통해 만나는 수많은 연(緣)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비록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내고 시각화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볼 수는 없지만 실존하는 우리 정신 혹은 ‘의식이 지닌 DNA의 파장’을 표현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차보리 작가의 작품제목을 보면 <7개의 소리>, <빛의 충돌>, <빛을 땋다>처럼 소리나 빛에 대한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둘의 공통점은 ‘존재감은 분명히 느껴지지만 시각적인 실체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차 작가는 이런 작품의 주제를 “선(線)의 미메시스(mimesis)”라고 설명한다. 그리스어인 미메시스는 ‘춤ㆍ몸짓ㆍ얼굴표정 등에 의해서 인간ㆍ신(神)ㆍ사물 등을 모방하는 것’이란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자연의 재현’이라고도 말했다. 예술 장르에선 흔히 재현(representation) 또는 모방(imitation)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차보리 작가의 작품에선 반복적인 선들이 시간성을 두고 교차하며, 제각각의 미미한 흔적들이 쌓여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낸다. 점으로 출발한 선들은 면을 만들고, 그 면들은 새로운 공간을 형성하며 ‘가상(가짜)의 옵스쿠라’를 완성시킨다. 이렇게 얻은 시각이미지를 평면작품이나 수많은 실선[絲線]을 현실공간에 구현한 설치작품 등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실존적 대상을 시각적으로 재현해도 그것은 결국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기 마련, 현존하는 모든 것은 ‘끝없는 미메시스의 산물’과도 같다. 결국 차보리 작가의 옵스쿠라 허상은 시각적인 형태가 불가능한 요소,―보이지 않는 감정의 흐름, 날카로운 빛의 맺힘, 고요한 소리의 고임, 사람들의 기록 등을 재현하고 있는 ‘컴퓨터 프로세스의 회화’가 아닐까.
작가 | 차보리(1981~)는 울산대 미술학부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일상적인 감성의 깊이를 이성적으로 해석한 기하학적인 화면구성으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2015 안국약품 AG갤러리 작가공모전 초대작가, 2007년 중국 아트페스티벌에서 금상, 울산광역시 미술대전에서 입상했다. 그동안 2009 October Tile 소녀의 일상(갤러리H/울산), 2009 Korea Art Summer Festival(Setec서울무역전시센터/서울), 2008 New York Story(세종문화예술회관/서울ㆍ중국베이징), 2007 Ture Dream_China Art Festival (Luxun Museum/중국), 2004 BBgirl Story(현대H갤러리/울산) 등 다섯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울산지방검찰청 등 여러 곳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현재 울산대학교 서양화과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글 ㅣ 김윤섭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 박사수료. 미술평론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 및 서울시 공공미술 심의위원,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