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 스페셜 포커스
[아츠앤컬쳐] “나의 관심 대상은 인간이다. 나는 언제나 인간을 표현하고자 했고 그들 내부의 반짝이는 빛을 포착하고자 했다. 요컨대 순수하게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현실 존재가 그것을 에워싼 외부 조건들 속에서 지니는 독특한 현실감을 표현하고자 했다.” - 로베르토 로셀리니
‘네오리얼리즘의 시작: <무방비 도시(1945)>’라는 짧은 타이틀로 간과됐던 로셀리니(1906~1977)의 세계를 심층 탐구해볼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 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로셀리니: 네오리얼리즘에서 휴머니즘까지’라는 주제로 그의 영화세계를 탐색하는 스페셜 포커스가 진행된다. 영화 <독일 영년>, <스트롬볼리>,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그리고 그의 메타 다큐멘터리인 <붉은 재>가 상영되며, 이탈리아 영화평론가인 아드리아노 아프라가 로셀리니 영화를 관객들에게 해설해주는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한다.
베르톨루치의 <혁명 전야>에서 인용된 “로셀리니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베르톨루치, 로시, 폰테코르보, 올미, 타비아니, 파솔리니, 벨로키오 같은 이탈리아 영화감독들은 로셀리니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그늘에서 작업해왔다. 네오리얼리즘 이후 세대의 감독들은 정치·사회에 애착을 가지고 집념의 이데올로기로 그런 문제들에 접근했다. 올미를 제외하고 로셀리니나 데시카가 대표하는 기독교적 휴머니즘을 받아들이는 감독은 별로 없었다. 그들은 장인이라기보다 지식인으로서 예술에 접근했고, 영화조합에서 견습하거나 로셀리니의 선례를 배우며 영감을 얻었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젊은이들 또한 로셀리니 작품을 통해 영화 미학을 습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영화가 네오리얼리즘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네오리얼리즘은 로셀리니에 의해 틀이 갖춰졌기 때문이다.”라고 <시네마 천국>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평가한다. 그만큼 로셀리니 감독과 네오리얼리즘은 불가결한 것이다.
로셀리니의 영화세계는 크게 ‘네오리얼리즘 시기’, ‘잉그리드 버그만 시기’, ‘역사극 시기’ 로 나눌 수 있다. ‘전쟁 삼부작’인 <무방비 도시>, <전화의 저편>, <독일 영년>에서 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 속에서 형성되는 현실과 인간의 운명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현실과 인간을 쫓는 집요한 시선으로, 개인의 운명을 조건 짓는 사회 상황을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돌아본 것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네오리얼리즘의 이념과 형식을 구현한 작품인 <무방비 도시>로서 그는 ‘네오리얼리즘의 창시자’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강조하건대 네오리얼리즘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시작된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로셀리니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네오리얼리즘이란 무엇보다도 이 세계를 볼 수 있는 도덕적 지위를 뜻한다. 그 후에 그것은 미학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것은 도덕적이었다.”
<독일 영년> 내면의 빛을 쫓는 현실 탐험
<전화의 저편>(1946)의 장면을 부분적으로 모방하여 전후 베를린에서 촬영한 <독일 영년>은 로셀리니가 죽은 아들을 추모하며 찍은 영화다.
“나의 관심 대상은 인간이다. 나는 언제나 인간을 표현하고자 했고 그들 내부의 반짝이는 빛을 포착하고자 했다. 요컨대 순수하게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현실 존재가 그것을 에워싼 외부 조건들 속에서 지니는 독특한 현실감을 표현하고자 했다.” - 로베르토 로셀리니 -
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 스페셜 포커스
로베르토 로셀리니 <네오리얼리즘에서 휴머니즘까지>작품의 도덕주의적 시각을 보여주는 비문인 “인간 삶의 토대가 되는 도덕성과 기독교적 자비라는 불멸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이데올로기는 범죄적 광기로 끝날 것이다.”를 비추며 페이드아웃 된다. 곧이어 폭격 맞은 독일 건물들을 보여주는 롱테이크 쇼트 위로 명료한 보이스 오버가 흐른다.
“이 영화는 반쯤 파괴된 이 거대한 도시를 그저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즉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에드문트의 이야기를 본 누군가가 무엇을 해야 한다… 독일 아이들에게 삶을 다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면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노고는 충분히 보상받을 것이다.”
로셀리니는 이 영화에서 타인의 잘못으로 누명을 쓰고 패배한 삶을 사는 약자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절망적인 결말과 삶에 대한 희망 없는 조망으로 <무방비 도시>에서 시작하여 <독일 영년>으로 이어지는 3부작을 마무리한다.
역시 전후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독일 영년>(1947)은 속임수를 써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열세 살 소년 에드문트의 이야기를 다뤘다. 부랑자로 전락한 도시민의 대다수처럼 에드문트는 단칸방에 모여 사는 가족의 먹을 것을 찾아 폐허가 된 건물들을 돌아다닌다. 아버지는 심한 장애로 몸져누웠고 여동생은 연합군을 상대로 매춘을 하며, 전쟁 중에 탈영하여 나치에게 쫓기는 형은 배급 카드가 없어 에드문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생존하느라 급급하던 와중에 에드문트는 예전 학교의 선생을 만나게 된다. 나치 잔당인 그는 모호하고 비판적인 사람으로 약자가 강자에게 굴복해야 한다는 이론을 에드문트에게 주입시킨다. 에드문트는 결국 쓸모없어 보이는 아버지를 독살하게 되고 이내 괴로움으로 몸부림치지만 그런 에드문트를 선생은 전혀 위로하지 않는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에드문트는 베를린 시내를 방황하다가 교회종탑에 올라가 아버지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를 보고는 뛰어내린다.
<독일 영년>에서 로셀리니는 객관적인 다큐멘터리와 도덕주의적 영화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 카메라는 기존 영화들보다 더 많이 이동하는데, 집착에 가까운 롱 트래킹 쇼트가 황폐한 도시 속의 에드문트를 끈질기게 뒤따른다. 주관적인 카메라 기법이나 각본의 미사여구에 의존하지 않고 순전히 외적 수단으로 주인공의 도덕적 공허함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로셀리니는 어린 소년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무방비 도시>에서 강조한 새로운 세대와 이탈리아의 봄, 즉 전쟁의 참사 후 재탄생에 대한 희망 간의 연계를 포기하고 있다. 히틀러의 사악한 유산을 없애는 데 독일이 성공할지를 의심한다는 반증인 셈이다.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 태양과 죽음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알기 위해 역사라는 건축물 속에 담겨 있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날짜나 이름, 동맹이나 협약, 배반, 전쟁, 정복이 아니라 사고가 변형되는 맥락을 따라가야 한다. 과거를 예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심판하고 미래를 향한 지침을 얻기 위해 역사를 활용해야 한다.” -로셀리니
‘역사적 시기’인 1963년부터 로셀리니는 상업영화 제작을 포기하고 역사 다큐멘터리 TV 시리즈를 만든다. 당시 그는 “나는 시네아스트가 아니다.”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다녔다고 하니 이는 ‘영화의 죽음’을 선포한 것과 매한가지다. 기존 영화에 대한 비판이 TV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 것이다.
로셀리니는 영화가 오락이 아닌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매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역사’를 통해 현대인을 깨우쳐줄 교육적인 영화 제작에 힘을 쏟는다. 이 시기에 9편의 작품을 완성하지만 지금까지 중요하게 평가받는 작품은 <루이 14세의 권력 쟁취>(1966)이며, 유일하게 극장에서 개봉된 TV 영화다.
이 작품에서는 현실과 현상, 가면과 얼굴, 변장과 실제 사이의 난해한 상호관계가 이해하기 어려운 주인공의 동기를 밝히는 키워드가 된다. 네오리얼리즘으로 회귀하는 양식적인 요소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데, 역사적 사실의 수집과 제시라는 다큐멘터리적 기법은 <전화의 저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감독에 의해 드러나는 루이 14세의 실체는 형식화된 궁중의식과 왕의 사생활에 대한 시각을 병치시킨다. 왕은 ‘사람이 사물의 성격보다는 외관에 지배받는다’는 신념으로 사치스러운 복장과 우아한 가발을 고집하며 국고를 탕진하며 <로베레 장군>에 나오는 사기꾼 지도자처럼 권력을 휘두른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왕의 실체가 드러난다. 루이 14세가 권력을 쟁취할수록 주변사람들은 떠나게 된다. 결국, 혼자 남게 되자 자신을 감싸고 있던 온갖 장식품들인 화려한 옷과 가발, 모자, 장신구들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그는 소리 내어 라 로슈푸코의 격언 ‘태양과 죽음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를 읽는다. 자신이 드디어 태양왕이 되었음과 이제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다. 더 이상 하잘것없는 인간으로 남을 수없다는 루이 14세의 은유적인 죽음으로 영화는 끝맺는다. 로셀리니는 빛나는 태양을 창조한 동시에 영화의 죽음을 선포한 것이다.
정란기
이탈리아 문화와 영화를 사랑하는 단체인 이탈치네마(italcinema.com), 뉴이탈리아 영화예술제(www.ifaf.co.kr)를 주최하는 등 이탈리아와 한국과의 문화교류를 위한 일을 하고 있다 . 엮은 책들과 역서로 <영화로 떠나는 시네마천국_이탈리아>, <난니모레티의 영화>, <비스콘티의 센소_문학의 재생산>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