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예쁘고 섹시한 속옷 쇼핑은 언제나 즐겁다. 특히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를 고르는 일은 그 어떤 속옷보다 즐거움이 두 배다. 국내에 정식 수입매장이 없어 눈이 빨개지도록 밤새 인터넷 쇼핑을 해야 하지만 빅토리아 시크릿은 구입하지 않아도 서핑 자체만으로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브랜드다.
그래서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를 관음하듯 서핑하는 즐거움은 남자들이 홈쇼핑 란제리 방송을 즐겨 시청하는 것만큼이나 나에게는 흥미로운 일이다. 언제쯤 인터넷이 아닌 매장에서 직접 쇼핑해볼 수 있을까? 꿈을 안고 있던 어느 날 촬영이나 휴가가 아닌 순수한 시장조사를 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게 되었다.
몇 번을 미국에 갔어도 바쁜 일정 때문에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에 가보질 못했던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번에는 꼭 가겠다는 야심한 계획을 세우고 ‘꼭 들러야 할 shop list 1순위’로 메모해두었다. 드디어 빡빡하고 짧은 뉴욕 일정 속에서 소호에 있는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을 찾아간 날, 난 입이 쩍 벌어졌다.
생각 이상으로 어마어마하게 큰 매장 규모와 알록달록하고 블링블링한 색상의 란제리 때문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 부인 그리고 엄마와 함께 쇼핑하는 10대 딸의 모습도, 레오파드 패턴의 브래지어와 티백 팬티(엉덩이를 감싸는 부분 없이 중요한 부분만 가리고 힙 부분이 드러나는 팬티)를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쇼핑하는 20대 여성들 때문도 아니었다.
나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 건 여자 고객 수만큼 많은 남자 고객들이었다. 연인과 함께 혹은 남자들 두세 명이 모여서 진지하게 여자 속옷을 고르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는 언감생심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평소에 쿨(cool)하다는 소리를 듣는 나조차 신기하기 그지없는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예쁜 나의 속옷을 고르겠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쇼핑하는 손님들 구경에 넋을 잃고 배회하고 다녔다.
화려하고 야한 속옷보다 더 화끈거리게 하는 란제리 쇼핑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생애첫 외국 여행을 떠났던 20대 시절 겪었던 문화 충격을 또 한번 느끼게 했다. 민망함이나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환하게 웃고 대화 나누며 속옷을 고르는 그들의 모습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남자랑 속옷을 같이 골라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남자와 함께 자기 속옷을 고르는 여자들의 모습이 신기하고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그렇게 넋 놓고 란제리 구경이 아닌 남자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누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30대 정도의 한국 남자였다.
“저… 한국인이시죠? 죄송하지만 사이즈 좀 봐주세요. 와이프가 80B를 사오라고 했는데 이게 맞는지…”
뉴욕으로 출장 온 남편에게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를 꼭 사다달라고 한 모양이다. 왜 아니겠는가? 난 그가 들고 있는 브래지어의 사이즈를 보고 확인해주었다. 몇 가지를 더 고르면서 나의 조언을 묻는 그를 위해 본의 아니게 내 남편이랑도 같이 해본 적이 없는 란제리 쇼핑을 생전 처음 보는 남자랑 같이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내가 골라준 란제리를 들고 연거푸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계산대로 향하는 그 남자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빅토리아 시크릿 매장은 그런 곳이다. 화려하고 섹시한 란제리 매장에 들어오는 남자도 부끄러움 없이 쇼핑하게 하는 곳. 판매원이 아닌 처음 보는 여자와 와이프의 란제리를 함께 쇼핑하게 하는 곳!
수영복인지 란제리인지, 란제리인지 수영복인지 헷갈리는 화려하고 예쁜 속옷을 구경하고 PINK 글씨 자수가 들어간 팬츠도 하나 사고 향긋한 꽃향의 바디 제품도 몇 개 사고 매장을 나오니 벌써 해가 높은 빌딩 사이로 저물고 있었다.
빅토리아 시크릿(Victoria’s Secret)은 레이먼드라는 한 남성에 의해 탄생됐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레이먼드는 어느 날 아내에게 선물할 속옷을 사러 갔다가 아내의 사이즈를 잘 몰라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여자 손님들 틈에서 일일이 사이즈를 들춰보며 쇼핑하느라 고생한 그는 개성도 없고 예쁘지도 않은 여성 속옷에 그만의 아이디어를 더해 1977년 ‘남자가 쇼핑하기 편한 여성 속옷 가게’를 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화려하고 약간은 퇴폐적이기도 한 그의 속옷 가게는 정작 여성들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빅토리아 시크릿이 날개를 달게 된 건 1980년대 의류업계의 대부 리미티드 브랜즈 회장 레슬리 웩스너가 인수하면서부터다. 약간은 퇴폐적이지만 빅토리아 시크릿만의 화려한 색과 개성 넘치는 디자인에 반한 웩스너는 <속옷=패션>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옷 안에 숨기는 란제리가 아닌 밖으로 당당히 드러내는 속옷이라는 발상을 더해 여성들이 입고 싶어하는 란제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의류 패션쇼보다 더 화려한 빅토리아 시크릿만의 패션쇼를 열면서 전 세계의 집중을 받고 급성장해나간다.
요즘 제일 잘 나가는 모델이 누군지 알고 싶다면 ‘빅시(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를 보라는 말이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는 세계적인 톱 모델들의 등용문이기도 하다. 해마다 미국 뉴욕 파크애비뉴 아모리홀에서 열리는 ‘빅시 패션쇼’에서 수많은 천사가 탄생한다. 세계적인 모델 지젤 번천, 나오미 캠벨, 케이트 모스, 타이라 뱅크스, 제시카 고메즈, 하이디 클룸, 미란다 커 등은 모두 빅토리아 시크릿 무대를 거쳐 간 ‘빅시 엔젤’들이다.
유난희
명품 전문 쇼호스트, 저서 <명품 골라주는 여자> <아름다운 독종이 프로로 성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