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4~5년 전 제주공항에서였다. 비닐랩으로 칭칭 동여맨 루이 비통 모노그램 트렁크가 수하물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 가방으로 향했다. 혹시 오염이라도 될까 봐 랩으로 야무지게 동여맨 모노그램 트렁크는 아름답기보다는 숨 막힐 듯 답답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루이 비통 트렁크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누구의 트렁크일까 궁금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루이 비통 트렁크를 수하물대에서 꺼내 비닐랩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저렇게까지 해서 갖고 다녀야 하는 거니? 비닐랩을 안 씌우면 안 되는 거니? ”
옆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친구 말에 웃음으로 답했지만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고가의 루이 비통 트렁크를 구입했으니 오염되지 않게 깨끗하게 오래 아껴 쓰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되지만 저렇게 비닐랩을 감아가면서까지 가지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광경을 본 이후로 트렁크는 역시 실용적이고 막 굴릴 수 있어야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렁크를 마치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 신경이 쓰여서 어디 맘 편하게 여행이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한 달 전 중년 가수 장미화 씨의 루이 비통 트렁크를 보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모 케이블 TV 채널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였다. 주제가 <명품>에 대한 거라 출연진들마다 자신이 가장 아끼거나 사연이 있는 명품 한 개씩 가지고 와 달라는 제작진의 부탁을 받았다. 나는 오랫동안 사용해 온 리미티드 에디션 루이 비통 다이어리를 가지고 나갔다.
다양한 명품 아이템이 출연진들의 손에 들려 나왔는데 그 어떤 아이템보다 나의 눈길을 끈 건 장미화 씨의 루이 비통 트렁크였다. 30년 전 <안녕하세요>란 노래로 요즘 싸이 만큼 인기를 누릴 때 재미 교포 위문 공연을 간 미국에서 구입했다고 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명품에 대한 관심이 높지도 않았고 명품 브랜드도 잘 모를 때였다. 순회공연하러 외국과 지방에 갈 일이 많아 물건을 넉넉히 담고 다닐 크고 튼튼한 트렁크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함께 간 지인이 루이 비통을 사라고 추천했단다.
당시에도 싼 가격이 아니었기에 아주 귀하고 좋은 브랜드의 트렁크라고 생각하고 공연 갈 때마다 항상 들고 다녔단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장미화 씨와 함께 여행 한 트렁크는 여기저기 스크래치 나고 손때 묻고 오염되어 많이 낡았다. 처음에는 빳빳했을 트렁크 내부의 거즈 재질 면 안감은 군데군데 얼룩지고 색상도 누렇게 바랬다. 그야말로 30년 세월을 함께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트렁크 모서리나 잠금 부분은 고장 나거나 나사못 하나 빠진 곳 없이 멀쩡했다. 루이 비통 매장 쇼윈도에서 반짝거리며 나의 시선을 잡던 신상 트렁크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색다른 느낌이었다.
‘명품이란 이런 거구나!’
내 머릿속에는 제주공항에서 보았던 루이 비통 트렁크와 장미화 씨의 트렁크가 오버랩되었다. 새 트렁크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과 흥분. 마치 보석 상자를 발견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루이 비통 트렁크는 실용적이지 못할 거라는 선입견이 없어졌다. 굳이 비싼 명품 트렁크를 사야하나? 하는 의문도 사라졌다. 30년의 세월을 함께 하며 그녀와 함께 지구촌 곳곳을 누볐을 트렁크는 그 존재만으로도 수많은 회환을 상상하게 했다. 귀한 트렁크는 그녀에게 친구였고 일기장이었고 사진첩이었을 것이리라. 또한, 그녀의 화려한 무대 의상을 담아낸 근사한 이동용 옷장이기도 했을 것이리라.
장미화 씨의 모노그램 트렁크를 보면서 나도 평생을 함께할 멋진 트렁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욕심이 생겼다. 그건 사치가 아니라 의미 있는 가치라고 생각했다. 세계 최대의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호가 인양될 때 발견된 루이 비통 트렁크, 그 트렁크를 열었을 때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깊은 바닷속에 있었음에도 트렁크 안의 물건이 하나도 물에 젖지 않았다는 사실은 믿거나 말거나 세간을 놀라게 했고 루이 비통 트렁크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믿음을 갖게 했다. 품질에 대한 믿음으로평생을 사용할 수 있는 트렁크라면 가격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는 분명 있는 셈이다.
루이 비통(Louis Vuitton)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3대 명품브랜드 중의 하나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14살 때부터 귀족들의 여행 짐꾸러미를 전문적으로 싸주는 패커일을 했던 루이 비통은 당시 귀부인들의 페티코트와 드레스가 장기간 여행 중에도 구겨지지 않도록 담을 수 있는 사각 트렁크를 만들었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프랑스 황실 궁중에서 도제로 일을 했다. 까다로운 귀족들의 눈높이에 맞춘 핸드메이드 트렁크는 그 시작부터가 명품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셈이다.
유난희
명품 전문 쇼호스트, 저서 <명품 골라주는 여자> <아름다운 독종이 프로로 성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