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 대한제국 견미사절단 일행
1883 대한제국 견미사절단 일행

 

[아츠앤컬쳐] 모자를 연구하다 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자의 명칭, 사용법, 유래 등 여러 부분에서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첫째, 모자에 대한 탐구 의지의 부족과 둘째로는 자료 부족, 무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덕분에 나는 여러 모임이나 환담 속에서 일상적인 모자이야기로 좌중의 압도적 관심을 받는 세상이 주는 선물을 받기도 한다. 필자의 경험상 일반인들이 가장 흥미로워했던 주제를 몇 가지 소개한다.

1. 탈모의 주범 “모자”?
무슨 월드컵이나 올림픽도 아닌데 거의 4년 주기로 ‘모자가 탈모의 주범이다, 아니다’라는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모자는 억울하다! 결론은 모자는 결코 탈모의 주범이 아니다.

“탈모는 모자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동윤외과의원장(2016)
“탈모, 모자보다는 스트레스와 환경 탓.” -뉴스포스트(http://www.newspost.kr) 2020

2. 순사 모자?

영국 황실의 사냥에 보이는 헌팅캡
영국 황실의 사냥에 보이는 헌팅캡

19C 아시아 국가 중에서 유럽의 문화를 최초로 개방한 국가는 일본이다. 당시 최고의 권력층이었던 일본 헌병경찰조직이 유럽의 귀족 신문화인 헌팅캡 모자문화를 제일 먼저 채택하였다. 헌팅캡은 당시 영국의 8개 명문대학의 재학 상류층 자녀들이 사냥대회 때 썼던 모자였다. 이 모자를 쓴 헌병경찰조직이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우리 민족에게는 수난과 혐오의 표상이 되어 일명 ‘순사모’(경찰=순사)라 불리게 되었다. 이 모자의 본명은 ‘Hunting cap 헌팅캡’이다.

3. 마술사의 모자?

top hat
top hat

챙이 높아 비둘기나 토끼를 숨겨두어도 표시가 나지 않아 마술사들에게는 필수품인 이 모자! 이 모자의 이름은 ‘Top hat’이다. 이 모자의 탄생의 배경은 많은 모자들을 가진 부자들에게 쉽게 세금을 거두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1784년~1811년까지 부과된 영국의 ‘모자세’를 말한다. 모든 모자에는 세금을 냈다는 증표를 부착했는데 이것이 Tag의 효시가 된다.

사람들은 이 모자세에 항의하기 위해 ‘모자 형태의 긴 구조물’을 쓰고 1797년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 Top hat이 유행하게 되자 영국 정부는 1804년부터 이른바 ‘모든 머리에 쓰는 것’을 대상으로 모자세를 확대하기로 한다. 이 모자세는 1811년에 폐지되었다.

4. 천한 신분이 썼던 모자?

신윤복 '청금상련'에 가리마를 쓰고 있는 기녀
신윤복 '청금상련'에 가리마를 쓰고 있는 기녀

가리마라는 모자는 조선 시대 기녀(妓女)•의녀(醫女) 등 특수층 여자가 머리 위에 쓰던 쓰개의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한때는 양반댁 부인들의 격식 있는 차림의 일부이기도 했다. 이렇게 누명을 벗게 된 사연이 있는데, 1989년 대구 달성군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현풍 곽씨의 부인 진주 하씨(1602년~1652년) 유품의 발견에서 기인한다. 여러 유품 중 그녀의 172통의 편지 중에 남편 곽주가 집안 어른의 방문을 대비하여 부인 하씨에게 당부하는 서찰이 있다.

“아주버님이 다녀가시려 하시니 주안상과 다과상을 잘 차리오. 음식은...(생략)차리도록 하소. 자네를 보려고 가시니 머리를 꾸미고 가리마를 쓰도록 하소.”

이 글의 출현으로 당시 가리마가 양반 계층에서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가리마의 다른 명칭으로는 가니마, 차액(遮額), 가리아, 가닐마라고도 부른다.

5. 갓의 크기에 따라 신분이 다르다?

크기별 갓과 옥로립,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크기별 갓과 옥로립,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갓의 외형적인 (크기)차이가 신분의 구분이 되는가? 결론적으로는 관계가 작다. 갓의 디자인과 크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행을 거치게 된다. 현대의 여성들의 치마 길이, 또는 남성들의 넥타이 디자인처럼 길이와 폭이 넓어지기도 했다가 좁아지고 길어졌다가 짧아지는 것처럼 갓도 유행을 거치며 사용되었다.

제일 큰 갓의 시기는 순조(1800~1834년 말)이다. 양태가 매우 넓어져 직경이 70~80cm 정도였다. 방안에 앉아 있으면 각자 대략 1m의 모자 넓이로 2m 이상 저절로 떨어져 있어야 해서 자동적인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했다.

옥로
옥로

물론 유행과 관계없이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크기를 고집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신 신분, 재력 등 남들과 차별을 두기 위해 사치를 부릴 수는 있었는데 갓끈의 장식을 화려하게 꾸미고, 임금이나 고관대작의 경우에는 갓 꼭대기에 ‘옥로립’을 붙이기도 했다.

글 | 조현종
㈜샤뽀 / 루이엘모자박물관 대표이사, 전북대학교 겸임교수/경영학박사
(사)하이서울기업협회 협회장, (사)한국의류산업학회 산학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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