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를 잡고 있는 무용수, 2001
바를 잡고 있는 무용수, 2001

 

[아츠앤컬쳐]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1932~)는 1932년 당시 카리브 연안 국가 중 가장 낙후된 콜롬비아 안데스산맥의 깊숙한 산속 메데인(Medellin)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려 16살부터 유력지 ‘엘 콜롬비아’ 일요판에 삽화를 그렸다. 당시 메데인은 오로지 바로크 양식의 성당과 고전 양식의 도시였다. 어느 날 우연히 초기 표현주의 기법과 큐비즘 스타일의 피카소 작품을 접하고 이후 국전 살롱에서 ‘해변가’로 2등을 하고 받은 상금으로 유럽으로 간다.

[사진 = Andre Engels]
[사진 = Andre Engels]

보테로는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서 고야,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등 그토록 원하던 대가들의 작품을 마주하였다. 산페르난도 아카데미에 등록한 그에게 교수들은 현대양식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으라 했지만, 그는 ‘무엇이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작품이 되게 하는가?’에 주목했다. 학교 대신 프라도미술관에 간 그는 고야의 작품에서 유머와 위트를 배우고, 벨라스케스 작품에서 섬세함과 견고한 터치를 익혔다. 그는 대가의 원작에서 고전의 색감과 공간미를 터득해가는 데에 심취하며 지냈다.

보테로 미술관의 시그니처 손 동상_사진제공_ Sebastian Sanint  www.ssanint.com
보테로 미술관의 시그니처 손 동상_사진제공_ Sebastian Sanint www.ssanint.com

이듬해 현대미술의 메카인 파리로 떠난 그에게 파리의 모더니즘 아방가르드는 난해했으나 루브르미술관에서 보물 같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미술을 발견했다. 그리고 피에로 델 라 프란체스카의 조형적으로는 엄격하고 견고하면서도 감각적, 촉각적 상상을 유발하는 그림에서 자극을 받는다.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는 소위 스탕달 신드롬에 빠진다. 경이로운 예술작품을 보고 충격에 직면한 것이다. 그는 프레스코 기법과 르네상스 고전 양식을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1952년 콜롬비아로 귀국하여 혹평을 받고 1956년 멕시코로 간다.

페르난도 보테로 미술관 작품_사진제공_ ProColombia
페르난도 보테로 미술관 작품_사진제공_ ProColombia

멕시코시티에서 쿠바의 이른바 봉쇄기의 ‘닭고기 요리법’으로 연명하며 치열하게 살던 어느 날 보테로는 벽화미술의 거장인 디에고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의 작품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에서 라틴아메리카의 뿌리를 생각하게 된다. 감각적이고 통통하면서도 자그마한 리베라의 인물들은 인간의 형상을 과장 혹은 완전히 축소시키는 보테로의 조형성의 단초가 된다. 유럽의 고전미술을 자기 작품의 이상형으로 보았던 보테로는 멕시코에서 비로소 라틴미술의 정체성에 눈을 뜬다.

만돌린 정물화.1957, 유채, 50x60cm
만돌린 정물화.1957, 유채, 50x60cm

“나에게 리베라의 작품은 매우 큰 의미였다. 그는 우리에게 유럽에 지배받지 않은 미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혼혈의 인물들, 오래되고 고유한 것의 혼합과 스페인 문화에 매료되었다.” 그만큼 멕시코는 그의 조형성과 작품 주제선정에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르네상스의 볼륨감을 갖고자 고민했던 보테로는 만돌린을 그리다가 새로운 조형 비율을 발견하게 된다. 

12살의 모나리자,1959, 유채와 템페라,211x195cm
12살의 모나리자,1959, 유채와 템페라,211x195cm

1960년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무렵 그의 작품은 추상과 형상이 혼합되어 있었다. 1961년 현대미술의 메카 뉴욕 MoMA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도로시 밀러가 그의 작품 ‘12살의 모나리자’를 구입하였는데, 이것이 그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1963년그 작품은 메트로폴리탄의 오리지널 모나리자 전시와 때를 맞춰 MoMA 현대미술관 입구에 걸리고 보테로라는 이름이 뉴욕에 알려지게 된다.

페르난도 보테로 미술관 작품_사진제공_Sebastian Sanint  www.ssanint.com
페르난도 보테로 미술관 작품_사진제공_Sebastian Sanint www.ssanint.com

당시 미국은 1950년대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 작가들을 중심으로 추상 표현주의, 앵포르멜, 팝아트 등 ‘미국형 회화’가 새로이 발전 중이었다. 앤디 워홀과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가 뉴욕 미술계를 장악한 상황에서 보테로의 작품은 호평을 받지 못했다. 물론 비평가들도 서로 다른 평을 할 수 있다. 고흐의 작품을 형편없다고 평하고, 세잔느가 마음에 들지 않아 휴지처럼 버린 작품을 엄청나게 칭송하는 등의 일이 종종 생기는 것이 미술계다. 그런데 미국 미술계의 입맛에 맞지 않는 뚱보 그림을 사람들은 환호했고 ‘타임’지에까지 실리게 된다.

춤을 추고 있는 연인 1987 유채.195x131cm
춤을 추고 있는 연인 1987 유채.195x131cm

보테로 작품 알아가기
보테로의 그림을 보면, ‘데포르마숑’ 즉 대상을 의식적으로 확대하거나 변형시킴으로써 작품의 본질을 명확히 하거나 미적 효과를 올리는 표현기법을 쓴다. 보테로는 르네상스식 최대의 볼륨을 그림자가 아닌 최대한 색으로 그려내는 자기 스타일을 가진다. ‘춤추고 있는 연인’에서 그는 최대한의 색감과 볼륨을 통해 편안한 웃음을 선사한다. 그런데 전략적으로 형태에 집중하고 인물의 개성을 배제하여 무표정한 채로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또한 형태나 비율이 자유롭다. 주제만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개의치 않는다.

평화의 새
평화의 새

1995년 보테로가 폭력과 마약으로 얼룩진 고향 메데인에 ‘평화의 새’를 기증했으나 게릴라단체가 폭탄을 설치해 조각이 폭파되고 45명의 시민들이 희생당한 일이 있었다. 보테로는 폭력이 끊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폭파된 작품 옆에 다시 동일한 작품을 나란히 세웠다.

보테로 미술관 내부에 위치한 아기자기한 가든_사진제공_ Sebastian Sanint  www.ssanint.com Sebastian Sanint  www.ssanint.com
보테로 미술관 내부에 위치한 아기자기한 가든_사진제공_ Sebastian Sanint www.ssanint.com Sebastian Sanint www.ssanint.com

작품이 가장 작가답게 표현되었을 때 가장 세계적이라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의 일상생활을 신비롭게 그려내면서도 그 안에서 ‘신형상주의’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부풀려진 인물과 독특한 양감의 정물 등을 통해 특유의 유머감각과 남미의 정서를 표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 | 안진옥
라틴, 스페인 미술전문기획자, 갤러리반디트라소/라틴커뮤니케이션 대표, 아르헨티나에서 박물학과 문화기획학을 전공하였다. ‘월드컵 국제 페스티발’(2002), ’라틴아메리카 거장展‘(2008), ‘태양의 아들, 잉카展’(2009) ‘페르난도 보테로展’(2009),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展(2012), ’프리다 칼로展‘(2016), ’황금문명, 엘도라도展‘(2018), ’쿠르즈디에즈展‘(2019-2020) 등 국내외 라틴, 스페인 전시 기획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를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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