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지장이 지옥의 중생을, 미륵이 내세의 중생을 구제해 주는 보살이라면, 관음보살은 현세의 고통을 없애 주는 보살이다. 실제로 관음보살은 원래 인도 바닷가의 보타락가산에 살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낙산사의 명칭은 ‘보타락가’의 ‘락’과 ‘산’에서 유래한다. 낙산사 홍련암은 남해 보리암, 서해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꼽힌다.
2005년 식목일, 양양에 뜻하지 않은 산불이 일었다. 강풍을 타고 산불이 번져 천혜의 풍광을 자랑하던 낙산사가 삽시간에 잿더미가 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사천왕문, 보타전, 의상대, 홍련암만 불타지 않아 새삼 불이 옮겨가는 바람길의 중요함을 알게 되었다. 이후 온 국민과 불자들이 정성을 모으고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5년 동안 복원하였다. 지금은 화마를 입지 않도록 수벽 장치와 바람길을 만들어 놓았다.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문무왕 11년(671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를 도왔던 당나라와의 사이에 나당전쟁이 시작되어 나라가 어지러울 무렵,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의상대사는 수도 경주에서 멀리 강원도 오봉산에 관음보살이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대사는 7일 기도 후에 바다에서 솟아난 홍련 위에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한 그 자리에 지은 홍련암에서는 지금도 바닥 구멍으로 파랑새가 날아간 관음굴에 세찬 물살이 들이치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관음보살이 대나무 한 쌍이 날 터이니 그 자리에 불전을 지으라고 하여 원통보전을 지었다고 한다.
낙산사에 오르는 솔숲을 지나 처음 맞는 홍예문은 위는 누각이요 아래는 둥그런 무지개문 형태인데, 1467년 세조가 방문했을 때 강원도 26개 고을에서 석재를 하나씩 보내어 건립한 문이다.
이어 화재를 용케 피한 사천왕문을 지나면 태양을 맞이하고 어둠을 몰아낸다는 빈일루다. 왼쪽으로는 화재 당시 소실된 동종을 복원하여 종이 두 개가 걸린 십자지붕의 범종루가 있다. 빈일루와 가까이 연꽃 모양의 문이 달린 응향각은 양옆으로 수도실과 종무소 건물이다.
이어 7층석탑 앞에 원통보전이 있다.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 법당으로 스님들이 화재로부터 구해낸 건칠관음보살상, 후불탱화와 함께 의상대사의 진영, 화엄일승법계도인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에는 뿔 대신 혹이 있는 동해 교룡이 있다. 낙산사를 사랑하여 3년이나 살았다는 허균도 이를 따서 호를 교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원통보전 옆 원통문을 나서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지나면 산 꼭대기에 16m 높이의 해수관음상이 위용을 자랑한다. 당시 동양 최고의 크기로 지은 해수관음상은 국내에서 가장 좋은 화강암이 나는 익산에서 화강암을 가져다가 세웠다.
해수관음상 아래로 동해를 조망하는 길지에는 공중사리탑이 있다. 1692년 홍련암에서 불사를 거행할 때 공중에서 유리처럼 광채를 내는 영롱한 구슬이 탁자에 떨어져 탑을 쌓고 그 구슬을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2006년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행한 공중사리탑 보존처리과정에서 부처님 진신사리와 장엄구가 출현하여 그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했다고 한다.
공중사리탑에서 '설렘이 있는 길'로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보타전은 천수관음을 중심으로 대표적 7관음을 포함하여 총 1500 관음상이 있다. 이는 전쟁에 시달리는 백성에게 관음보살의 원력과 자비심을 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외벽에는 의상대사의 일대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절벽 위의 의상대는 의상대사의 좌선 수행처로서, 아름다운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옆으로 어우러져 서 있는 소나무는 의상대사의 절친인 원효대사의 모습이라고 한다.
당시 삼국 통일과 나당전쟁을 겪고 어려운 세상살이에 지친 백성들에게 원효대사는 나무아미타불을, 의상대사는 나무관세음보살을 전파하여 지금까지도 불자들이 가피를 원할 때 염불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글 |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