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臺山 上院寺
[아츠앤컬쳐]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산(聖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라의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받아 돌아와, 문수보살의 가르침대로 우리나라에서 오대산을 찾아 월정사를 창건(643년)하고, 중대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조성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 원년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신라의 두 왕자인 보천과 효명이 벗들과 작별인사를 하듯 마지막으로 놀고는 홀연히 사라져 오대산에 들어간 것이다.
두 왕자는 각기 암자를 짓고 수행하며 지내다가, 형 보천이 왕위를 사양하고 동생 효명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성덕왕이다. 보천은 705년(성덕왕 4)에 지금의 상원사인 진여원을 세웠고, 그를 통해 오대산은 동·서·남·북·중대에 각각 1만 보살이 머무는 5만 보살 성지가 되었다.
그 후, 고려시대를 거치며 황폐해진 상원사는 나옹스님이 주석하며 나옹의 제자 영령암이 1377년(우왕 3)에 중창하였다. 조선 초 척불정책에도 불구하고 1401년(태종 1)에 상원사의 사자암이 중건되었다. 또한, 이 절은 1466년(세조 12년)에 상원사를 중창한 세조의 원찰로 세조와의 각별한 일화가 얽혀 있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단종의 생모이자 형수인 현덕왕후가 꿈속에 나타나 세조에게 침을 뱉은 후 피부병을 얻게 되었다. 세조는 사찰을 찾아 참회기도를 하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지냈는데,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에서 혼자 씻다가 동자로 현신한 문수보살을 만나 병이 낫게 되었다. 이에 감격한 세조가 친견한 동자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 바로 문수동자상이며, 목욕을 할 때 관대를 걸어두었던 곳이 지금의 관대걸이다.
문수전 계단 옆에 한 쌍의 고양이 석상에도 전설이 있다. 상원사를 찾은 세조가 불전에 들어가려고 하자 고양이가 옷자락을 물고 당기며 못 들어가게 막기를 수 차례 하였다. 수상함에 불전을 수색하니 불단 밑에 자객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기리고자 고양이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조선 중기에 이르러 왕실의 사고(史庫)]가 오대산에 들어서게 되면서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번창하였다.
근현대에 들어서도 이에 못지않은 이야기가 전한다. 6·25전쟁 때의 일이다. 상원사에는 한암스님이 주석하시고 제자 탄허, 만화스님이 함께 했다. 예지력이 뛰어난 탄허스님이 전쟁의 변고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통도사로 잠시 피하자고 했으나, 한암스님이 거부하고 홀로 남자 만화스님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시중을 들었다.
1.4후퇴 과정에 국군은 오대산의 사찰이 적의 소굴이 될 것을 우려하여 월정사를 비롯하여 온 사찰을 불태우고 상원사마저 소각하려고 했다. 이에 한암스님은 법당에 앉아서 사찰과 운명을 같이하겠다며 죽음을 초월한 생사일여의 자세를 보였다. 절을 지키려는 스님의 완강함에 감동받은 국군은 문짝만 뜯어 태워 상원사를 소각한 듯 연기를 내고 돌아갔다.
상원사에서 20여 분을 올라가는 사자암은 오대를 뜻하는 오층 향각이 새로 들어섰고 맨위에는 화려한 비로전이 자리한다. 고즈넉한 옛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호화롭게 번창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듯하다.
더 올라가면 어사 박문수가 ‘천하의 명당 자리’라고 감탄했다는 적멸보궁이다. 불사리는 뒤에 동산처럼 된 곳에 안장되어 있고 앞에는 5층 목탑이 양각된 앙증맞은 마애불탑이 있다.
적멸보궁은 특이하게도 속칸 위에 겉칸이 감싼 겹집 형태다. 속칸은 세조가 다녀갔다고 하니 조선 초기인 15세기 이전의 건물이다. 겉칸은 연약한 집을 폭설, 폭풍우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나중에 덧지은 것이라고 한다.
상원사 당우 중에 영산전은 선원에 실화가 번졌을 때에도 불길을 모면한 건물로 산내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이며, 동정각에는 725년(성덕왕 24)에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이 보존되어 있다. 안동의 한 사찰에 있다가 불교 박해로 문루에 걸려있던 것을 예종 때 상원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종이 죽령을 넘으려 하지 않아, 종 상단에 돌출된 꼭지를 하나 떼어 안동으로 보내니 마침내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국 종 고유의 특색을 갖추고 종신에 아름다운 비천상이 있으며 청아한 음색을 가졌다는데, 보호 차원에서 수리 후 종을 치지 않고 있어 아쉬울 따름이다. 실제로는 뒤에 보이는 복제한 종을 사용한다.
글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