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 속 충만함의 진수
[아츠앤컬쳐] 백영수 화백의 1주기를 맞아 ‘하얀여름’이라는 제목으로 의정부 백영수미술관에서 기념전(6.27~9.15)이 열린다. 이번 전시에는 주로 여백이 강조된 그림들이 주인공이다.
백영수 화백의 흰 여백은 아주 특별한 감성을 자극한다. 사각의 화면을 꽉 채운 흰 바탕은 작은 창문을 발견하고서야 벽면이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그림들의 네모진 화면 끄트머리를 따라 얇은 선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선이 아니라, 색칠하지 않고비워놓은 캔버스 바탕천처럼 보이도록 섬세하게 덧칠한 것이다. 결국은 그 얇은 테두리 선이 여백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렇듯 백영수 화백의 여백은 긴장과 이완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림들이 더욱 지적이고 명상적인 감흥의 여운을 남긴다.
생전에 백영수 화백의 닉네임은 ‘한국 근현대 미술의 전설’ 혹은 ‘신사실파(新寫實派)의 유일한 생존작가’, ‘한국 근현대미술을 관통하는 상징적 인물’ 등으로 통했다. 특히 1947년 출범한 ‘한국 최초의 순수화가동인’ 신사실파의 멤버였다는 점은 백화백의 작품세계를 가늠하는 주요한 잣대이기도 하다.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유영국 등 함께 활동한 멤버들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특징은 ‘새로운 사실화’를 표방했다는 점이다. 백 화백은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넘나든 포용적이고 친밀감 넘치는 작품세계를 개척했으면서도, 오히려 미술사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아직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
그런 측면에서 흥미로운 소식이 전해진다. 오는 11월 국내에 처음으로 미술 분야의 특성화 도서관이 의정부에 건립된다고 한다. 지상 1층엔 미술 작품과 전문 자료를 위한 공간으로 꾸며지고, 2~3층엔 누구나 미술을 편하게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실과 다목적실이 자리 잡는다. 더욱이 5억8800만 원을 들여 특별히 미술 분야 도서 3만여 권을 구입하는데, 이를 백영수미술문화재단과 협력해 체계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백영수 화백은 ‘의정부시의 문화경쟁력을 담보해줄 문화콘텐츠’라는 점을 보여주는 상징적 계기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백영수 화백은 40여 년의 프랑스 활동을 마치고 2011년 귀국해 지난해 별세하기 전까지 의정부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물론 지금의 백영수미술관도 그 작업실 부지에 지어진 것이고, 미술관 곳곳에서 지금도 백 화백의 체취와 작업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 자리에서 1주기 기념전이 열린다는 점에서 백 화백을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작품들도 평면회화 100호 크기부터 소품, 오리 형상을 모티브로 한 석고 입체 작품 등 20여 점 이상 선보인다.
고요한 아침안개 같은 품성을 지녔던 백 화백은 평소에 아주 소소한 일상의 소품을 활용해 뭔가 만드는 걸 즐겼다. 사실 딱히 특별한 작품재료랄 것도 없다. 작은 초콜릿 포장지나 포장 끈, 버려진 철사, 냅킨 등 화백의 여린 손끝에서 오물조물 잠깐의 시간을 거치면 어느덧 또 다른 생명력을 얻곤 했다. 조용한 창조적 탄생의 순간이다. 마치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는’ 중도적 삶의 방식을 작품으로 표현해낸 듯하다. 아마도 이번 1주기를 기념한 ‘하얀 여름’전 역시 ‘백영수 화백이 추구했던 삶의 방식’을 작품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 화백의 삶의 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비움 속의 충만’이란 키워드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의 그림 속에선 서로 상반된 개념인 비움과 충만이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몸처럼 밀착되었다. 대기를 꽉 채운 공기처럼 특유의 공간구성과 특유의 백색톤은 전시제목인 ‘하얀여름’을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사계절 중에 시원함을 가장 크게 느끼는 계절이 언제일까? 바로 여름이다. 가장 강렬한 태양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극과 극은 통하듯이, 태양빛이 뜨거운 만큼 반대급부로 시원함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온 대기가 태양의 기운으로 꽉 찰수록 아주 미세한 바람의 흔적마저도 섬세하게 와 닿기 마련이다.
아마도 백 화백의 드넓은 백색 바탕이 한여름의 충만한 태양빛이라면, 남겨진 테두리 여백선이나 작은 창문은 실바람과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흰색 바탕색이 주조를 이룬 ‘백영수의 화풍’은 겨울보다 여름을 더 닮았다. 작업실에서 뵌 백 화백의 모습 역시 늘 ‘백의(白衣)의 기품’을 잃지 않았었다. 스스로가 흰색 빈 캔버스가 되어 ‘평화롭게 잠든 아이를 품은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그려냈다.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마저 더없이 값진 감흥을 불러일으켜낼 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였다. 올해의 여름은 ‘백영수 화이트’로 물들어 더없이 감성적 충만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작가소개 | 백영수 (1922~2018)
1922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해 2세에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이 살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 하고 20대 초반 귀국해 목포의 미술교사와 광주의 대학교수를 역임했다. 그 후 40여 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체류하다 2011년 귀국해서 의정부에 정착해서 활동을 했다. 2018년 96세로 별세한 후 작업실 자리에 백영수미술관이 건립되어 의정부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개인전: 서울, 로마, 밀라노, 파리, 뉴욕 등 다수. 단체전: 그림이 있는 파리전(프랑스), 신사실파 60주년 전 외 다수. 작품소장: 국립 현대미술관 외 다수.
필자소개 | 김윤섭
미술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