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quiat, Untitled (Fallen Angel), 1981 Courtesy Tony Shafrazi Gallery
Basquiat, Untitled (Fallen Angel), 1981 Courtesy Tony Shafrazi Gallery

[아츠앤컬쳐] 올해 5월 소더비 경매에서 미국작가 작품 중 최고액 기록을 경신하며 바스키아의 1981년 작‘무제(해골)’이 1억1천만 달러(약 1,250억 원)에 일본인에게 판매되었다. 미술시장 입성 후 8년간 화려한 질주 끝 27세에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바스키아. 그가 앤디 워홀과 마켓에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의 성공 뒤에는 후원자들의 마케팅 전략이 있었다.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이 사망한 뒤 작업을 거의 하지 못하고 일 년쯤 지나 세상을 떠났다.

대학 시절에 본 바스키아 영화를 다시 봤다. 영화에서 그는 그림을 그만두고 아프리카에 가서 테킬라 공장을 하며 시를 쓰고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그만둔 건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 축제에서 불나방처럼 제 몸을 태워버린 걸까? 그 짧은 시간에 수천 점의 그림을 남기고서…. 승냥이들이 호시탐탐 유혹하는 자본의 하이얀 불바다에서 흐드러지게 놀다 외롭게 사그러져버린 천재작가 바스키아.

1960년 브루클린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에 읽고 쓰기를 하고, 어머니를 따라 미술관에 가고, 예술에 천부적 재능을 보이며, 열한 살에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는 신동이었다고 한다. 8살에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어머니가 사주신 해부학 책은 후에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다.

Basquiat, Self-Portrait, 1982 Basquiat
Basquiat, Self-Portrait, 1982 Basquiat

부모님의 이혼과 어머니의 정신병원 입원 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공원에서 지내기 시작한다. 후두둑 빗줄기가 세차게 떨어지는 날 공원 벤치 옆 허약해 보이는 나무 사이에서 종이박스 뚜껑을 열며 바스키아가 나와 빗속을 달려간다. 그가 친구집으로 들어가자 함께 생활하고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노닥거린다. 티셔츠와 엽서를 팔면서 생활을 유지하고 밤에는 음악을 연주하고 파티에 참석한다.

1977년 친구 알 디아즈와 마리화나를 피우다가 생각해낸 ‘SAMO(SAMe Old shit)’라는 사인을 한 급진적 성향의 그라피티 작업을 맨하탄 소호, 빌리지, 매리븐 갤러리 근방, 트라이베카 지역 벽에 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바스키아는 소호 한 레스토랑에서 앤디 워홀에게 엽서 크기의 그림들을 10달러라고 하면서 보여준다. 워홀은 바스키아의 그림에 반하고 함께 작업을 하게 된다.

Warhol-Basquiat. Paintings, 1985 Posterfor Collaborations Exhibition Courtesy TonyShafrazi Gallery
Warhol-Basquiat. Paintings, 1985 Posterfor Collaborations Exhibition Courtesy TonyShafrazi Gallery

이미 미술시장에서 거장의 위치를 자리하고 있던 워홀과 바스키아는 32살의 나이 차이에도 깊은 예술적 교감을 하며 함께 공동작업을 하게 된다. 1980년대는 바스키아가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던 시기다. 거리의 벽에 낙서를 하던 그가 사이 톰블리와 장 뒤뷔페의 영향을 받아 신표현주의와 원초주의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피카소 특유의 원시적인 이미지와 선, 그리고 키스해링 그라피티가 엿보이고, 라우젠버그의 오브제 꼴라주 적인 성향도 묻어져 나온다.

그는 어린아이가 낙서를 하듯 그가 보는 세상을 그림 속에서 퍼즐링한다. 그는 세상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고 무엇에 취했던 것일까? 그는 사람의 얼굴을 아름답게 그리지 않는다. 못생기게 그리거나 해골로 표현한다. 왜냐는 기자의 질문에 괜찮은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보여지는 것만이 아닌 내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종종 사람 머리 위에는 후광을 그려놓았다. 죽음에 관한 관심인가, 아니면 영혼? 사후세계? 종교적 호기심.

Basquiat, Untitled (Skull),1981 Courtesy Tony Shafrazi Gallery
Basquiat, Untitled (Skull),1981 Courtesy Tony Shafrazi Gallery

미숙한 아이가 별생각 없이 자기 발산적으로 함부로 그린듯한 그림들 속에는 글들이 난무하다.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한편의 이어진 대서사시라 하기엔 단편적이다. 왕과 영웅들, 노예제도에 대한 이야기, 인종 차별, 깊숙이 뿌리 박힌 권력구조를 맹렬히 비판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세상을 부와 가난, 인종적 통합과 차별, 내면과 외면 등을 이분법으로 양분하여 재구성한다. 역사 속에서 이미 무수한 일들이 일어났고 또 무수히 많은 현실들은 괴리를 빚어내고 있다. 인간의 진실함에 대해 탐구한다. 하지만 온통 이해가 가지 않고 삶은 풀어지지 않는 실타래처럼 그저 마구 뒤엉켜있다. 비판적 원초적 혼돈의 상태.

1985년 바스키아와 워홀은 콜라보레이션 전시를 한다. 당대에 두 수퍼스타 작가들에게는 꼬리가 보이지 않는 풍문들이 따라다녔다. 급기야 한 비평가가 공식적으로 워홀이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통해 바스키아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고 공표하였고, 그들의 사이는 멀어졌다. 어릴 적부터 왕을 꿈꾸던 바스키아는 워홀처럼 수퍼스타가 되기를 열망하였고, 워홀은 미술시장에서 그를 이끌어 준 아버지였고 또한 서로에게 뮤즈인 것을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문제가 되었다는 것인지….

1987년 워홀이 세상을 떠나고 1년이 조금 지난 여름 바스키아는 그림을 그만두고 아프리카로 가서 시와 음악을 하겠다고 그의 마지막 여자 친구에게 말한다. 아프리카행 비행기 티켓 날짜를 6일 남겨둔 채 그는 칵테일과 마약 과다복용으로 작업실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가 태어난 브루클린 공동묘지에서 300명가량의 지인들과 함께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는 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뉴욕을 떠나고 싶어했던 걸까? 온통 백인친구들과 지내던 그는 왜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 했을까? 워홀이 떠나고 백인들의 세상이었던 미술시장에서 소외되어서? 흥미를 잃어서? 피부색이 같은 사람들이 사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던 바스키아. 왜 사람들의 그의 우아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혼란스러운 어린아이의 반항적인 낙서같은 그림에 열광하는가? 훨훨 날아오르고픈 그의 거침없는 혼돈의 몸짓은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이야기와 급변하는 사회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

글 | 장신정
New York University 예술경영 석사, 전MoMA PS1 Contemporary Arts Center, 전 아시아문화전당 전시팀장, 기획전 큐레이팅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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