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1997년 가을 영국에서 매스미디어와 상품, 성, 폭력, 마약 등의 주제로 한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전시반대 논란을 일으켰던 ‘센세이션’ 전시의 배경에는 찰스 사치라는 인물이 있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로열아카데미에서 열린 이 전시에는 사치가 2만5천 유로를 지원하여 제작한 박제상어를 유리관에 넣은 데미언 허스트의 ‘살아있는 자가 상상할 수 없는 육체적 죽음’, 자신의 피를 얼려 자화상 조각을 만든 마크 퀸의 ‘셀프’, 그리고 전시 철회 시위에 계란 세례까지 맞은 가장 이슈가 된 작품인 어린이 연쇄살인범의 대형 초상화를 아이들의 손에 물감을 찍어서 그린 마커스 하비의 ‘마이라’ 등 40여 명의 작가 작품 110여 점이 전시되었다. 이는 사치의 소장품으로 yBa(young British artists 젊은 영국 작가들)의 작품이다. 사치는 전시를 위해 작품대여는 물론이고 작품 설치비로 200만 파운드를 제공하였고, 입소문이 퍼져 30만여 명의 역대 최대 관람객을 유치하는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1999년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센세이션’ 순회전시를 개최하는데 또 한번의 큰 논란이 일어난다. 가톨릭 신자인 뉴욕 시장 줄리아니가 전시도록에서 작품 중 흑인 성모상과 코끼리 똥, 성적인 이미지로 구성된 크리스 오필리의 작품 ‘성모 마리아’를 보고 전시 철수 명령을 내린 것이다. 전시를 강행하자 줄리아니는 미술관 리노베이션을 위해 지원하기로 한 자금과 연간 운영비 지급을 중지하겠다 하여 소송에까지 가게 되었다. 물론 미술관이 소송에 이기기는 했지만, 후에 알려진 바로는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려던 줄리아니가 실업률이 개선되지 않자 비난을 피하려고 유권자들의 시선을 돌리려는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데미언 허스트는 이를 보고 “그가 왜 내게 친절을 베풀고 있지? 덕분에 내 작품 가격이 상승하겠네.” 한다. 뉴욕 전시의 성공으로 영국 미술계는 세계미술시장에 급부상하게 되고 yBa 작가들의 작품가는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고 작품 소장가인 사치는 쾌재를 부른다. 과연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
찰스 사치는 1943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영국으로 이민온다. 1970년 동생과 함께 ‘사치 앤 사치’ 광고 회사를 설립한다. 1979년 마가렛 대처를 수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동당을 비방하는 광고를 제작하여 유명세를 타게 되는데, 구직을 위해 줄을 길게 선 실업자들 위로 ‘노동당은 무능해’ 라고 쓰여진 포스터로 단순하면서도 강한 호소력을 표현했다. 단순명료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 한눈에 읽히면서도 강렬하게 오랜동안 머리속에 남는 광고를 만들던 사치의 취향과 yBa 작가들의 작품들은 닮아있다. 비평가들은 사치가 젊은 작가들에게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충격적인 작품을 만들도록 길들였다는 비판을 던진다. 데미언 허스트의 박제상어가 사치의 아이디어라는 풍문이 돌고, 심지어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사치의 취향을 고려한 작품을 만든다는 이유로 ‘애완용 작가pet artist’라는 말까지 생겨난다.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과 개인적 직관으로 작품을 수집하는 미다스의 손. 사치 컬렉션 입성은 가격 상승, 유명 상업 화랑 및 미술관에서 초대, 부와 명예를 거머지게 되는 지름길을 의미한다. 사치의 첫 소장품은 1969년 뉴욕 미니멀 작가인 솔 루윗의 드로잉이었다. 초기에는 미국동부 명문대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그의 첫부인 도리스와 함께 뉴욕을 수시로 드나들며 미국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1985년 자택 근체 페인트 공장을 개조하여 기존에 런던의 갤러리와 차별화되는 확 트인 공간과 천정으로부터 자연광이 들어오는 갤러리를 오픈한다.
사치는 갤러리 홍보에도 광고보다는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등 입소문 전략을 활용한다. 컬렉션을 담은 4권의 카탈로그를 제작하여 80파운드에 판매했는데, 유명한 출판사에서 제작된 세계적으로 명성있는 비판가의 평론이 들어간 도록은 런던의 서점에 특별히 디자인된 진열대에 놓이는 특권을 누린다. 도록이 영구소장품으로 인식 되면서 마케팅 전략은 성공을 거둔다. ‘오늘의 뉴욕 미술’ 전시를 열어 동시대 미국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선보이면서 영국 젊은 작가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었고 젊은 혈기를 자극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일상적 오브제를 유리장에 넣은 제프쿤스의 작품은 허스트의 유리장 속 박제상어를 연상하게 한다.
사치는 1988년 데미언 허스트가 큐레이팅한 ‘프리즈’ 전시를 보고 영국 신진작가 작품 수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골드스미스대학 졸업생 16명으로 구성된 ‘프리즈’ 전시 작가인 데미언 허스트,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게리 흄 등의 작품을 대량으로 구입하고 자신의 갤러리에서 ‘사치의 yBa’ 전시를 기획하면서 yBa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게 된다. yBa 작가들이 세계미술계에 급부상하게 되는 또 다른 원인은 영국 정부 차원에서 젊은 국가의 이미지로 개선하려는 노력과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졌다는 점이다. 이시기에 사치는 그가 소유하던 유럽 뉴욕의 작품들을 팔아서 yBa 작가 작품을 지속적으로 구매하고 후원하였다. 독주를 달리고 있던 뉴욕 미술시장을 가까이서 견주어볼 만큼 영국미술이 성장한 것은 사치의 영민함과 냉철한 비지니스적 감각의 산물이다.
사치는 박애정신이 배재된 탐욕적인 사업가의 기질로 인해 비난을 받기도 한다. 젊은 작가 제니 사빌에게 생활비를 지원해주겠다면서, 작품 우선 구매권을 요구하는데, 이는 르네상스 시대 후원자들이 흔히 쓰던 방법이다. 1978년 미국작가 줄리안 슈나벨의 초기 작품 10점을 구입, 이사로 있던 테이트 미술관 슈나벨 개인전에 9점을 대여, 작품가 상승, 후에 150배가 넘는 이익을 남기며 모두 처분했다. 1985년 이탈리아작가 산드로 키아와 논쟁 이후 그의 작품 7점을 처분하면서 언론에 컬렉션 일부 ‘숙청’을 발표하여 키아의 작품가격이 크게 하락하게 되는 치명적인 파장을 남기었다. 현대판 메디치라고도 불리우는 사치의 컬렉션은 여전히 뭇시선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미술시장에 거품을 형성했다는 비난 또한 피할 길이 없는 것도 현실이다.
글 | 장신정
문화예술기획자, New York University 예술경영 석사, 전MoMA PS1 Contemporary Arts Center전시설치팀장, 전 아시아문화전당 전시팀장, 기획전 큐레이팅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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