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감동시키다

패로탱갤러리 전시장 내부전경, Photo: Claire Dorn, Courtesy Galerie Perrotin
패로탱갤러리 전시장 내부전경, Photo: Claire Dorn, Courtesy Galerie Perrotin

 

[아츠앤컬쳐] 5월 둘째 주에 베니스에 비엔날레 전시관람차 들렸었다. 비엔날레 사무국 주최전시 외에도 섬 전체가 볼거리로 넘쳐났다. 그중에서도 한국의 ‘단색화’ 전시가 눈에 들어왔다. 베니스 전시에는 단색화 대표 작가로 꼽히는 박서보(84), 정상화(83), 하종현(80), 이우환(79), 작고 작가인 김환기(1913~1974), 권영우(1926~2013), 정창섭(1927~2011)의 작품 50여 점이 전시되었다.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인 팔라초 콘타리니 폴리냑에 전시되어 있는 우리의 단색화가 점잖으면서도 운치 있게 한국미술의 저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전시장에서 만나 뵌 박서보작가는 살아생전 이런 날을 맞이할 수 있어 기쁘다며 감격어린 자랑이 끊이지 않으셨다.

정창섭 화가
정창섭 화가

베니스의 이러한 쾌거는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파리의 메이저갤러리로 국제적 명성이 자자한 페로탱갤러리(Galerie Perrotin)에서도 단색화 대표작가인 정창섭의 <묵고(Meditation)>전시가 김용대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6월 4일에 오픈했다. 국내 유명작가들이 꼭 한 번쯤 전시하고 싶어하는 세계적인 갤러리 중 하나인 이번 페로탱전시는 정창섭이 살아생전 이룩한 한국미술에 대한 업적을 기르는 뜻깊은 전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의 눈에 파리 미술계 전문가들에게 정창섭의 작품은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

실상 우리 단색화 작품들은 서양인들에게 이질감보다는 친숙하면서도 다른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정창섭의 1995년작 <묵고951120> 의 경우 프랑스 작가 이브 클랭(1928~1962)의 작품을 연상케 할 정도로 겉모습이 많이 다르지 않다. 누보 레알리즘, 즉 신사실주의 작가인 이브 클랭은 ‘푸른색이야말로 비물질적인 형이상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무한한 의미를 지닌다.’는 신념으로 푸른색 모노크롬 회화를 제작했다.

묵고 951120, 1995, 캔버스에 닥종이, 244 x 122 cm,Photo: Claire Dorn, Courtesy Galerie Perrotin
묵고 951120, 1995, 캔버스에 닥종이, 244 x 122 cm,Photo: Claire Dorn, Courtesy Galerie Perrotin

정창섭은 회화의 기초를 서양화 교육을 통해 연마했으나 기름진 유화 기법과 융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체질을 깨닫고, 마치 동양의 수묵화처럼 엷게 번지고 스며드는 자연주의적인 화법을 실험하게 된다. 그러던 그에게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는 1970년대 중반이다.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로서 종이, 즉 한지(韓紙)를 운명처럼 만나게 된 것이다. 한국인의 보편적인 민족성과 정신성을 상징하는 재료인 종이를 사용하고, 더 나아가 종이의 원료인 닥을 주재료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정창섭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가 구축되었으니 서양의 모노크롬과는 제작방식은 물론 그 안에 담긴 정신이 확연히 구분된다.

묵고 93103, 1993, 캔버스에 닥종이, 244 x 122 cm,Photo: Claire Dorn, Courtesy Galerie Perrotin
묵고 93103, 1993, 캔버스에 닥종이, 244 x 122 cm,Photo: Claire Dorn, Courtesy Galerie Perrotin

물기를 머금은 닥 반죽을 캔버스 위에 올려 손과 닥의 직접적인 교감을 통해 발현되는 <닥> 연작, 금욕주의적인 색채와 최소한의 언어로 귀의한 그의 마지막 연작 <묵고>는 닥이라는 물질이 지닌 고유의 생명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잊는 침묵과 무명의 상태를 전제로 한다. 작가는 채 마르지 않은 닥 반죽을 캔버스 위에 올려놓고 시간이 흐르면서 형태가 굳어지는 것을 지켜보고 수용해야 하는 것이니 서양의 미니멀작가들처럼 기계로 정확하게 획일적으로 제작하는 것과는 접근방식이 판이하다. 우리의 분청사기가 미완성된듯한 모습으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내듯 한국의 단색화 작품에는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는 데서 나오는 우연 속에서 빚어지는 아름다움과 인간도 자연과 하나라는 ‘물아합일(物我合一)’의 세계관이 담겨 있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레바논계 미국시인인 칼릴 지브란의 시이다. 이처럼 우리의 단색화의 아름다움은 보여줄 수 있는 것보다 내재되어 있는 한국적 미의식이 뿌리 깊다. 이러한 한국적 정신과 정서를 서양인들에게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지만 그들은 이미 매료되어 버린 것 같다.

닥 86033, 1986, 캔버스에 닥종이, 240 x 140 cm, Photo: Claire Dorn, Courtesy Galerie Perrotin
닥 86033, 1986, 캔버스에 닥종이, 240 x 140 cm, Photo: Claire Dorn, Courtesy Galerie Perrotin

갤러리 전시장 오프닝에 별관에서 마련된 프라이빗 디너에는 정창섭 작가의 가족들은 물론 관계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디너가 시작되자 페로탱은 격식을 차린 멘트를 준비하지 않았다며 즉석으로 관계자들을 소개하고 감사를 표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김용대 큐레이터의 완벽주의에 패로탕도 혀를 내두르는 눈치였다. 만찬 메뉴를 보니 접시 안에도 단색화의 향연이 계속되었다. 본식으로 백색 모노크롬이라며 대구의 하얀 살만 삶아서 원형으로 담은 밥위에 올려 아이보리 빛깔이 감도는 크림소스로 맛과 향을 냈다.

오프닝 리셉션, Photo: Claire Dorn,Courtesy Galerie Perrotin
오프닝 리셉션, Photo: Claire Dorn,Courtesy Galerie Perrotin

한편, 현 프랑스 최고의 화상으로 불리는 엠마뉴엘 페로탱이 지난 2014년 말 박서보 전시에 이어 정창섭 전시를 몇 달도 채 안 되어 선보이는 이유가 궁금하다. 우리의 단색화의 아름다움에 반해서일까? 한국미술의 저력을 예견한 것일까? 국제미술시장의 빠른 움직임을 재빠르게 감지하고 거상도 움직이는 것일까? 오랜 저력으로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파리 미술시장의 핵심에서 누구보다 영향력있는 그가 단색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음은 틀림없다. 이 기회에 한국미술과 우리작가들이 파리미술계에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글 | 이화행
아츠앤컬쳐 파리특파원, 파리 예술경영대 EAC 교수
소르본느대 미술사 졸업, EAC 예술경영 및 석사 졸업
inesleear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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