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아츠앤컬쳐] 앤디 워홀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1988년 늦여름 어느 날, 바스키아는 그의 작업실에서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는 17세에 아티스트가 되기로 결심하고 고등학교와 집에서 뛰쳐나왔다. 뉴욕 빌리지와 워싱턴스퀘어 공원의 열린 하늘은 그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고, 27세에 약물과다로 요절하기까지 바스키아는 맨해튼이라는 도시를 캔버스 삼아 강렬하고도 충동적인 작품을 그려내었다.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그의 작품은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천진하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보호받기를 거부한 그는 거리의 악사가 되어 뉴욕의 빌리지를 ‘SAMO’라는 사인과 함께 철학적인 시들과 낙서로 채워나갔다. 극적인 크기의 캔버스 위에 대비적이고 열정적인 색과 선들이 함께 어우러져 그의 세상을 향한 질풍노도의 감성과 혼란스러움을 신명 나게 표현해 내었다. 선과 색들은 마치 재즈 연주자들이 순간의 어울림으로 음색을 만들어 내듯이 즉흥적이다.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마치 무당이 접신이 되어 한판 흐드러지게 굿판을 벌이듯 그렇게 뿜어져 나오는 그무엇을, 무의식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자아를 표출해낸다. 백인중심사회에서 흑인의 지위, 인간 감성의 허구를 폭로 거부하고 또 비인간화와 이 사회의 모순을 비판한다.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소호의 한 레스토랑에서 자신이 만든 엽서를 앤디 워홀에게 팔기 위해 보여주었고 워홀은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보게 된다. 그들은 함께 작업을 하고 깊이 교감하는 절친한 동료이자 연인이 된다. 미국의 미술시장은 새로운 스타를 갈망하고 있었고 바스키아의 격정적인 추상 표현주의 작업은 화랑가를 열광하게 했다. 최초의 흑인 스타가 미술시장에 탄생하게 된 것이다.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 The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ADAGP, Paris, ARS, New York 2013

 

클럽을 즐겼고 양성애자이기도 한 그는 찢어질 듯이 예민하고 여린 감수성을 지녔다. 한순간에 스타가 된 바스키아는 미술시장 생리에 환멸을 느꼈었고, 워홀이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우울증과 마약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그는 무엇을 위해 그림을 그렸던가? 그토록 강렬한 색들과 낙서들, 그려낸다는 것만으로는 그 자신의 광기를 이겨내기가 힘에 겨웠던 것인지… 뉴욕의 격변기를 스쳐 지나간 한 흑인 아티스트의 장난기 어린 즉흥적 정치적 작품들은 앤디 워홀과 함께 뉴욕 미술시장의 빼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글 | 장신정
아츠앤컬쳐 뉴욕특파원, 전시 & 프로그램 기획. NYU 예술경영석사. 전 MoMA P.S.1. 전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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