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눈에 쓸려간 사랑 이야기

카트린느 드뇌브
카트린느 드뇌브

 

[아츠앤컬쳐] 얼마 전 인기를 끌던 <슈룹>이란 드라마가 절찬리에 종영되었다. 조선시대 궁중의 교육을 배경으로 한 내용이 흥미로웠지만, 드라마의 제목인 ‘슈룹’ 또한 생소하고도 특별했다. ‘슈룹’은 순우리말로 ‘우산’을 뜻하며, 드라마에서는 자신들은 비에 젖어도 왕자들에게 비 막이가 되어주는 궁중 사모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대변했다.

이와 같이 우산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의 정서나 내러티브의 흐름을 대변하는 소품 역할을 단단히 해낸다. 예를 들어 동심을 사로잡는 <메리 포핀스>의 앵무새 손잡이 우산이나,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우산을 든 진 켈리의 탭댄스를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오드리 햅번이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선보인 우아한 드레스와 레이스 우산, 그리고 무채색의 동네인 <플레전트빌>을 물들인 마가렛의 빨간 우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프랑스 뮤지컬 영화 <쉘부르의 우산>(Les parapluies de Cherbourg)의 오프닝 시퀀스는 우산과 관련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카트린느 드뇌브를 세기의 여배우로 만든 <쉘부르의 우산>은 첫 시작부터 비 내리는 해안마을을 파스텔톤의 우산들로 수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우산 가게의 외동딸 주느비에브와 자동차 수리공인 기와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감미로운 사랑과 묵직한 이별의 고통, 덧없는 재회의 순간을 섬세하게 그려낸 자크 드미(Jacques Demy) 감독의 <쉘부르의 우산>은 미셸 르그랑(Michel Legrand)의 음악과 함께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크게 헤어짐, 고독, 재회의 순간을 차례로 다루고 있는데, 비 내리는 거리와 눈 내리는 주유소를 배경으로 하는 테마곡 ‘내 사랑, 영원히 당신을 기다릴게요(Mon amour, je t’attendrai toute ma vie)’는 장면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영어권에서는 ‘I will wait for you’로 알려진 이 곡은 주느비에브와 기의 듀엣으로 불리며 이별을 마주한 그들의 애달픈 감정들을 속속들이 표현해낸다.

French theatrical release poster
French theatrical release poster

 

며칠 전부터 난 사랑이란 벽들의 침묵에 둘러싸여 있어.

네가 떠나는 순간부터 부재의 그림자는 매일 밤낮으로 찾아왔다 또 달아나.

너 없이 난 아무것도 아니기에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환상이 깨졌기에 모든 것을 포기할 거야...

(중략)

난 결코 너 없인 살 수 없어. 그러니 떠나지마.

네가 없는 순간 난 죽어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까.”

<쉘부르의 우산>에서 테마곡은 두 연인 간의 감정과 상황의 흐름을 주지시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쟈크 드미는 음악에 프랑스 뮤지컬의 방향성을 관철시키는데, 바로 대사와 노래를 분리하지 않고 오히려 대사를 노래로 처리한 것이다. 이는 섬세하고 노련한 미셸 르그랑의 스코어와 만나 자연스럽게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게 된다. 한 예로 영화 평론가인 마이클 윌밍턴(Michael Wilmington)은 “기차역의 이별 장면에 삽입된 테마곡의 우울한 곡조와 요동치는 후렴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감정의 고조를 불러온다.”고 평가했다.

catherine-spaak-la-noia-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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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곡에서 돋보이는 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형식적인 완결감과 2도 인터벌의 감각성, 그리고 가수들의 가창력을 꼽을 수 있다. 먼저 곡의 형식은 오케스트라의 인트로와 기의 레치타티보, 이어지는 주느비에브의 코러스, 오블리가토와 듀오로 마무리되며 고전성 가운데 감정의 고조를 꾀한다. 여기에 마이너 코드 톤에서 반복되는 단2도와 장2도의 연속 쓰임은 고통 속에서 재회를 다짐하는 두 연인의 씁쓸하고도 달콤한 이별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또한 간절한 가사와 애수에 찬 선율을 목소리로 재현하는 다니엘르 리카리(Danielle Licari)와 호세 바텔(José Bartel)의 노래는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다. 1970년대 스캣 앨범 <목소리를 위한 협주곡(Concerto pour une voix)>으로 전 세계를 매료시킨 리카리와, <정글북>의 프렌치 킹 루이 역으로 유명한 바텔 모두 탁월한 가창력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Les_parapluies_de_Cherbourg_Reclame_voor_deze_film_in_Amsterdam_bij_de_Dam
Les_parapluies_de_Cherbourg_Reclame_voor_deze_film_in_Amsterdam_bij_de_Dam

테마곡의 영어버전인 ‘I will wait for you’은 작사가 노먼 김벨(Norman Gimbel)의 개사로 큰 사랑을 받았는데, 이후 제38회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면서부터 전 세계로 알려져 인기를 끌었다.

<쉘부르의 우산>의 백미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두 번째 이별에 있다. 3년 만에 기의 주유소에서 우연히 재회한 옛 연인들은 감정을 숨긴 몇 마디 대화로 운명의 어긋남을 받아들인다. 주느비에브는 같이 온 프랑소아즈가 기의 딸이라 말하지 못하고 떠나고, 기는 주유소에 도착한 현재의 아내와 딸을 반기며 눈 장난을 친다. 그러나 감독은 텅 빈 주유소의 풍경을 고정한 채 진정한 엔딩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눈으로 뒤덮인 주유소를 응시하며 끝나지 않은 노래 속에서 끝도 모르는 비애감에 빠져들게끔.

글 | 길한나
보컬리스트
브릿찌미디어 음악감독
백석예술대학교 음악학부 교수
stradak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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