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우리는 대부분 삶의 어느 시점에서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제는 곁에 없게 된 그 가족의 영정 사진 앞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기억하며 감정의 파도에 마음을 내맡긴다. 먼저는, 나의 기억이 닿는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꺼내어 일기장 뒤져보듯 샅샅이 탐험을 시작한다. 뇌의 심해로 헤엄쳐 지나온 세월마다 저장해둔 기록을 훑어보다가 수면으로 점차 올라오면, 떠난 가족과 최근에 더 자주 행복한 기억을 쌓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한탄하기를 반복한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함께하고 있지 않은 가족뿐만 아니라 자기(self) 자신이 누구인지,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모를 것이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 아니 어쩌면 1분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현재’에만 존재하는 생물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렇게 기억이란 것은 우리의 삶을 영위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많은 학자들이 ‘기억’이라는 것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기억이란 것은 뇌의 여러 영역이 망으로 연결되어 굉장히 복잡한 체계 안에서 생기는 개념이라 하였다.

1968년 Atkinson과 Shiffrin이 주장한 기억 모델은 현재까지도 적용되는 전통적인 기억 분류 체계인데, 이들은 기억을 크게 ‘감각 기억’, ‘단기 기억’, 그리고 ‘장기 기억’의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감각 기억은 뇌 용량의 제한이 없이 시청각 정보를 아주 짧게 기억했다가 1초 미만의 시간 동안 지각된 감각을 그 형태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저장하기로 선택하지 않으면 1-2초 이내 바로 사라져버리는 아지랑이와 같은 기억이다.

단기 기억은 들어온 정보에 주의를 기울여 암송하는 과정을 거치면 단기간 저장되지만, 간섭 자극에 취약하여 잠시 한눈 팔면 수초에서 수분 내 곧 사라지는 기억이다. 장기기억은 조금 더 복잡하지만, 크게는 서술 기억과 비서술 기억으로 나눌 수 있다. 서술 기억은 말 그대로 ‘말’로 설명 가능하고 본인이 의식적으로도 인식할 수 있는 기억의 형태이다. 반면 비서술 기억은 무의식적으로 그 기억에 의해 나의 행동이 변화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는 기억인데, 가장 쉬운 예로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을 들 수 있다.

기억에 관련된 다양한 해부학적 구조 중 가장 유명한 영역은 해마(hippocampus)로, 해마는 사건을 기억하고 회고하는 영역이다. 하지만 개별 항목을 저장하고 인식하는 해마 주변 영역의 도움도 있기에 우리는 기억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 중 특별히 여기는 ‘감정’이 부여된 기억을 ‘추억’으로 지칭한다. 실제로 우리는 해마에서 시작하여 시상 (thalamus), 띠다발 (cingulum) 등의 영역이 연결된 파페츠(Papez) 회로라는 뇌 안의 시스템을 통해서 기억에 감정을 덧 씌워 저장하게 된다.

여러 영역의 연결로 유기되는 기억 기능에 의해, 우리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자신’의 의미를 쌓으며 살아가게 된다. 삶이 멈추고 죽음이 오더라도, 우리는 남은 이들의 추억을 통해 살아생전 존재의 의미를 한 그루 나무처럼 이 세상에 계속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아닐까?

고려시대 명승 중 한 명인 나옹 화상(懶翁 惠勤 1320 ~1376)의 누이가 지은 '부운(浮雲)'이라는 시를 나누고 싶다. 아직 삶에 머무는 이들에게, 생사에 연연하지 않고 맑은 ‘오직 한 가지’가 어떤 의미인지를 찾는 하루이길 기도하면서.

 

공수래공수거 시인생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空手來空手去 是人生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연(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독유일물상독로 담연불수어생사(獨有一物常獨露 湛然不隨於生死)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생은 어디서 왔으며, 죽으면 어디를 향해 가는가.

태어난다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며,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 사라짐이네.

뜬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무상한 것이니 생사의 오고감 또한 이와 같도다.

오직 한 가지만 항상 깊고 고요하게 드러나 생사에 연연하지 않고 맑다네.

 

글 | 김혜원
뉴로핏 (NEUROPHET) 메디컬 디렉터,
신경과 전문의, 대한신경과학회 정회원,
前 서울아산병원 임상강사, 지도전문의,
방병원 뇌신경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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