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희, 기억97, 1997, 크리스탈 Casted, 25×58×17cm
고성희, 기억97, 1997, 크리스탈 Casted, 25×58×17cm

 

[아츠앤컬쳐] 고성희 작가는 작품의 중심적인 모티브이자 출발점을 기억으로 삼고 있다. 인간은 기억과 망각의 그물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 둘의 사이를 무수히 오가며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만약 인간에게 망각의 능력이 없었다면, 온전한 삶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래서 적절한 망각은 건강한 삶을 만들어주는 구심체이기도 하다. 고성희 작가는 기억의 어떤 면을 주목하는 것일까?

기억(記憶)과 망각(忘却)은 빛과 그늘과도 같다. 동전의 양면처럼 등을 맞대야만 존재할 수 있다. 흔히 기억의 반대말을 망각이라고 하지만, 기억의 반대말은 망각이 아닐 수도 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이스라엘 페르세 전 대통령은 기억의 반대말은 상상이라고 했다. 과거의 길을 되돌아보는 것이 기억이라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은 상상이기 때문이다. 상상은 무에서 유를 창출하고, 혁신의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래서 미래는 상상하는 자의 몫이다.

고성희, 기억, 소대유리 Slumped, 60x89x27cm, 대전시립미술관 소장
고성희, 기억, 소대유리 Slumped, 60x89x27cm, 대전시립미술관 소장

고성희 작품에서도 기억을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어쩌면 기억이란 시간의 굴레에 잠들었던 상상적 미감을 다시 일깨우는 과정일 수도 있다. 이것을 고 작가는 기억 연습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과거가 있지만, 적절하게 망각하는 힘의 작용으로 현재와는 연결이 잘 안될 때도 많다. 고성희 작가는 그 둘을 이어줄 매개 역할을 활자(活字)에서 찾았다. 글을 인쇄하기 위해 만든 글자틀인 활자엔 보이지 않는 힘이 담겨 있다. 당시의 환경이나, 기억을 유지해주는 것이 활자가 가진 본질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부분적으로 활자를 자주 등장시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흐려진 기억의 재소환을 위한 조처(措處)이다.

고성희 작가는 우리나라에 유리 조형을 들여온 1세대 작가이다. 국내 미술대학의 학부와 석사과정에서 조각을 전공했지만, 늘 새로운 재료연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진 못했다. 프랑스 파리국립미술학교를 거쳐 체코와 독일 등의 여러 공방까지 수년 동안 섭렵하며, 유리 조형 작업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귀국한 국내 실정은 유리 작업에 관한 기자재나 시스템이 전무한 상태였다. 그나마 유럽 시절에 고물상에서 구해온 납 활자를 작업에 응용해 본인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납 활자인가?

고성희, 오래된 기억1, 2022, 옵틱 글래스 casted, 30x30cm
고성희, 오래된 기억1, 2022, 옵틱 글래스 casted, 30x30cm

납 활자에 대한 첫 선입견은 차가움이다. 하지만, 활자를 통해 텍스트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더없이 따뜻한 감성과 감흥을 자아낸다. 대화의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활자는 또 조형적으로도 완결성까지 지녔다. 서사적 사고와 조형미의 완결성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활자야말로 완벽한 작품의 소재가 되어줬다. 작품의 중심 매개체였던 활자를 한국에선 구할 수가 없어서 유럽에서 가져온 서너 주먹으로 초창기 작업을 했다가, 최근에 파주출판단지에서 극적으로 납 활자를 구하게 되어 다시 활자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성희의 작품에서 파편화된 요소들이 결합한 형태는 문학적 해석으로 유도하는 역할도 한다. 한 점의 작품 안에서 기본적인 형상 이외에 빛에 의한 반사와 굴절 등이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단편 소설이나 에세이를 만난 것처럼, 보는 이의 기억과 만나면서 의외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재구성되는 듯하다. 간직하고 싶은 모습, 행복 혹은 불행하고 슬펐던 기억들, 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빛바랜 필름에 투영되어 살아온 나날을 영사(映寫)해주는 것이다.

고성희, 기억공간 20-8, 2020, 청경 sandblasted, 93x63cm
고성희, 기억공간 20-8, 2020, 청경 sandblasted, 93x63cm

고성희의 유리 조형 작품들은 저마다 기억의 창이 되어 이름 모를 삶에 대한 많은 흔적을 되새기게 해준다. 바로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20여 년을 더 훌쩍 지나서 초창기 활자 작업을 다시 중심으로 내세운 것 역시 작가적 초심을 되찾기 위함일 것이다. 이미 막연해지고 희미해진 기억들이 반사거울에 비쳐 다시 메아리를 전하듯, 깊은 사유의 우물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길어 올리고 있다. 고성희의 기억 연습은 삶의 진실한 모습이 투영된 고백과도 같다. 차가운 유리가 어느새 더없이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온기를 전하고 있다. 고성희의 개인전 <기억 연습>은 서울의 청작화랑에서 이달 5일에서 25일까지 진행된다.

고성희, 오래된 기억, 2019, 옵틱 글래스 Casted, 50x50x42cm
고성희, 오래된 기억, 2019, 옵틱 글래스 Casted, 50x50x42cm

 

고성희
고성희

고성희(1961~) 작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학사와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국립미술대학 초청학생과 파리 ADAC 유리전공을 거쳐 홍익대학교 대학원 조소과 박사과정도 수료했다. 그동안 30회 이상의 국내외 개인전과 400여 회의 기획단체전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삼척시 도계의 유리나라제작 총괄, 삼척 도계역 상징 조형물, 제주 유리의 성제작 총괄, 삼성 코닝 가치 창조의 탑’, 태국 몽쿳왕립대학, 대전시립미술관 등 국내외의 공공미술을 비롯한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남서울대학교 학부 유리세라믹디자인학과와 유리조형대학원 주임교수로 있다. 또한 남서울대학교 유리조형연구소장 이외에도 UN 지정 ‘2022 세계 유리의 해한국위원, 홍익조각회 회장, 천안문화재단 이사, 성암현대유리역사박물관 관장, 남서울국제유리조형페스티벌 총괄 등을 역임했다.

 

글 | 김윤섭

명지대 미술사 박사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아이프aif 미술경영연구소 대표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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