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Watch_Rembrandt(1642)
Night Watch_Rembrandt(1642)

 

[아츠앤컬쳐]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는 과학과 예술의 중심지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에서 9남매 중에 여섯째로 태어났는데, 당시 아버지는 방앗간을 운영하는 상인으로 중산층에 속하는 집안이었다. 렘브란트는 일찍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는데, 그의 그림은 명암법을 활용한 사실적인 묘사로 주목받으며 빠르게 성공 가도를 달렸다. 163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그는 초상화가로 큰 인기를 얻었고, 1634년에는 상류층 여인 사스키아(Saskia van Uylenburgh)(1612~1642)와 결혼해 사회적 입지도 굳혔다.

렘브란트의 <선술집의 방탕아(Rembrandt and Saskia in the Scene of the Prodigal Son)>(1635년 추정)는 렘브란트와 그의 아내인 사스키아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방탕아 역할을 스스로 연출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뛰어난 재능으로 20대에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사회적 신분이 낮았다. 그런 그는 프리슬란트(Friesland) 지방의 레이우아르던(Leeuwarden)시의 시장의 딸 사스키아와 사랑에 빠지는데, 사스키아는 당시 여성들로서는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사스키아는 결혼하면서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왔고 렘브란트는 결혼과 동시에 사회적 신분이 높아지면서 돈과 사랑과 명예를 확고하게 구축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는 렘브란트가 아내 사스키아와 함께 선술집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흥청망청 즐기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그림처럼 렘브란트는 사스키아와의 결혼으로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기 원했다. 그리고 아내의 지참금을 탕진하고 있다는 비난에 맞서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로 초상화 주문이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치품 구입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낭비벽 때문에 렘브란트는 말년에 파산 선고를 받는다. 말년에 병약한 사스키아가 죽으면서 재혼하지 않는 조건으로 남긴 유산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도제 교육을 통해 많은 제자를 키웠는데, 이들은 단순한 보조를 넘어 실제 그림 작업에도 참여했다. 당시의 관행상 작업실의 제자들이 그림의 밑그림을 그리거나 색을 칠했고, 렘브란트는 마지막 손질을 더해 완성했다. 이 때문에 일부 작품은 렘브란트 진작 여부를 두고 지금도 학계에서 논쟁이 이어진다. 그의 화풍은 제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렘브란트파’라는 학파가 형성되었고, 제자 중에는 훗날 화가로 독립한 자들도 많았다. <선술집의 방탕아>는 일반적인 초상화나 종교화와 달리 개인적 서사가 강한 작품이기 때문에, 렘브란트가 단독으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도제교육의 일반적 작업 방식에 따라 기초 채색, 배경 작업 등에는 제자들의 도움이 있었을 수도 있다.

Rembrandt and Saskia in the Scene of the Prodigal Son_Rembrandt(1635년추정)
Rembrandt and Saskia in the Scene of the Prodigal Son_Rembrandt(1635년추정)

이런 경우 <선술집의 방탕아>를 렘브란트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유사한 사건에 대한 법원이 판단이 있었는데, 내용을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렘브란트를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1483~1520),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 등 서양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유명화가들이 도제교육의 일환으로 자신의 공방에 조수나 화가지망생 등을 제자로 두고, 엄격한 지휘ㆍ감독하에 대규모 벽화나 초상화 등은 물론 소규모 회화 작품의 제작에까지 도움을 받은 것은 미술사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도제교육은 보통 스승-제자 관계로 교육이 이루어 지며 정규 교육과정을 강사가 커리큘럼대로 교습하는 방식이 아닌 제자가 스승의 실무를 보조하며 기술을 습득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도제교육의 전통은 현대미술에서도 여전히 통용되는 작업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작가 혼자서 단시일 내에 완성할 수 없는 대규모 벽화나 회화 작품의 제작이나 조각ㆍ공예ㆍ응용미술ㆍ설치미술 등 다양한 미술분야에서 세분화된 전문가들의 협업의 필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고, 이에 따라 조수 또는 보조인력을 고용하여 일정 작업을 분담시키거나 석공, 세공사 또는 전문제작업체 등 특정한 전문기술자에게 필요한 작업을 의뢰하는 등의 방법으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경우가 늘어가고 있다.

한편, 팝아트(Popular Art) 등 현대미술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특정 장르에 있어서는, 개념과 실행을 분리하여 '작가'의 영역은 오로지 아이디어의 창출에 있는 것이고, 작가가 실행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는 노동과 시간 등 물리적인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더 자유롭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의 창작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 작가들도 있다. 이러한 작가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전시ㆍ거래되는 작품을 제작ㆍ판매함에 있어 추상적인 아이디어와 개념만 제공할 뿐 이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실크스크린 등 기계적인 힘을 빌리거나 고용된 다수의 조수 또는 보조인력을 이용하여 대량생산하여 판매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고, 그러한 제작방식과 거래형태가 널리 퍼져 있다.

이렇게 유명 화가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해 보수를 받고 작품제작에 도움을 준 기술적인 보조자는 고유한 예술적 관념이나 화풍 또는 기법을 미술작품에 구현한 해당 미술작품의 작가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미술작품의 주요 콘셉트와 소재는 작가가 결정하고, 작가의 의뢰에 따라 작가의 기존 회화작품의 화풍을 그대로 그리거나 또는 작가의 지시 혹은 설명에 따라 그림으로 그려서 제공하는 행위는 보조자로서 ‘밑그림 제작’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 보조자가 해당 미술작품 제작에 관여한 정도 및 수령한 보수의 유무나 그 액수 등에 관한 사항은 누가 ‘작가’인지 ‘보조자’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이라고도 볼 수 없다. 보조자를 사용한 제작방식이 미술계에 존재하고 있는 이상, 일반인이 이를 용인할 수 있는 지의 여부 등은 ‘법률적’ 판단의 범위가 아니다. 물론, 이러한 행위가 ‘윤리적’ 또는 ‘예술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지 여부는 다른 문제다.

 

글 | 이재훈

성신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변호사 / 변리사 

법학(J.D.), 기술경영학(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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