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e La Boétie
[아츠앤컬쳐] 시대의 화상(畫商) 폴 로젠베르그(Paul Rosenberg, 1881-1959)의 컬렉션을 소개한 전시 <보에시가 21번지(21 Rue la Boétie)>가 마욜 미술관(Musée Maillol)에서 한창이다. 보에시가 21번지는 바로 폴 로젠베르그의 저택이자 갤러리의 주소였다. 오스만 형식의 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한 파리 8구에 위치한 보에시가는 지금도 유대인 화상을 비롯한 대형 갤러리들과 앤틱상이 위치한 길들을 잇고 있다.
이번 전시는 폴 로젠베르그의 손녀딸인 안 생클레르(Anne Sinclair)가 할아버지를 회상하며 쓴 수필에서 시작되었다. 그녀의 회고록 <보에시가 21번지>는 여러 언어로 번역이 되어 소개될 만큼 화제가 되었다.
20세기 프랑스 거상이 당대의 화가 피카소, 마티스, 브라크, 마리 로랑생과 함께 겪은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굴곡진 이들의 삶과 예술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유럽의 전후세대에 큰 공감대를 얻었다.
폴 로젠베르그의 아버지 알렉산더 로젠베르그는 1878년에 프랑스로 온 슬로바키아 출신의 유대인 이민자이다. 그는 장사에 실패하고 자신의 취미였던 그림과 오브제 수집에 관심을 돌려 파리의 오페라 거리에 작은 앤틱상을 시작하였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레옹스(1878-1947)와 폴이다. 형제는 1906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일하며 사업을 배웠다.
몇 해가 지나 파리가 홍시로 도시 상당부분이 물에 잠겼던 해인 1910년에 형제는 각각 자신의 갤러리를 열었다. 폴은 보에시가에 그의 형 레옹스는 ‘봄므가 19번지(19, rue de la Baume)’에 연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업을 시작한 형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레옹스는 큐비즘에 집중하였고, 폴은 좀 더 폭넓은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들을 소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레옹스는 자금난을 겪게 된다.
반면 폴은 인상파부터 큐비즘까지 두르두르 소개하면서 사업을 번성시켰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피카소와 같은 거리에 살면서 작품의 유화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가져올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웠다. 두 사람은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후원자였다. 당시 피카소는 큐비즘에서 다시 고전풍의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폴의 부인과 그의 딸을 담은 초상화가 이번 전시에 소개되었다.
또한, 폴은 샤넬의 친구로도 알려진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과도 독점계약으로 그녀를 후원하였다. 폴의 손녀딸 안 클레르의 얼굴을 담은 초상화에 담긴 스토리가 흥미롭다. 당시 로랑생은 모든 초상화 속에 검정색의 작은 눈을 그렸는데, 꼬마 소녀 안 클레르가 그녀에게 자신의 눈 색깔을 그대로 파랗게 그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식구들 사이에 전해내려온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폴은 마티스와도 함께 일했다. 당시 마티스는 화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컬렉터에게 작품을 판매할 정도로 깐깐했었다는데, 그런 그도 폴을 신뢰하게 되어 상당수의 작품을 일임하였다.
한편, 꿈과 열정을 담은 보에시가의 활기는 2차 대전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전쟁의 위험을 피하여 폴은 가족들과 맨하탄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상당 수의 작품들이 당시 독일군의 강압적 압수로 인해 유럽 전역에 흩어지게 되었다. 폴의 운전기사가 보르도 근교에 비밀리에 보관했던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 400여 점이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로 돌아온 폴은 남은 여생동안 잃어버린 작품들을 찾는데 헌신한 끝에 300여 점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글 | 이화행
아츠앤컬쳐 파리통신원, 파리 예술경영대 EAC 교수
소르본느대 미술사 졸업, EAC 예술경영 및 석사 졸업
inesleeart@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