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1년간의 프랑스 앤틱가구 연재를 마치고 새로운 소재를 찾던 중에 <비데르마이어 가구>가 눈에 들어왔다. 절제된 고풍스러움과 현대적인 세련됨이 묻어나는 비데르마이어(Bidermeier) 가구는 요즘 인테리어와도 잘 어울린다. 전체적으로 모던하게 꾸며 놓은 공간에 앤틱가구를 포인트로 한두 점 비치하면 퍽 멋스럽다.
비데르마이어 양식(Bidermeier Style)
오스트리아 빈의 19세기 초에 등장한 비데르마이어 양식은 새롭게 실용성과 편안함, 우수한 품질을 강조한 가구이다. 이는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금장식으로 잘 알려진 <엠파이어 양식>의 화려함과 육중함에 상반되는데, 한눈으로 보아도 표면에 장식이 없이 매끈하다. 표면의 나뭇결이 마치 대리석의 무늬처럼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비데르마이어의 특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심플하면서 균형 잡힌 구조로 제작되었으며, 목재의 경우 환한 톤을 주로 사용하였다. 혹자는 이를 프랑스의 레스토라시옹(Restauration) 양식이나 영국의 레전시(Regency)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비데르마이어의 어원은 1853년 빈의 두 작가가 풍자지에 소개한 두 주인공의 이름인 비데르만(Biedermann)과 부멜마이어(Bummelmeier)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독일어로 비데르(Bieder)는 ‘정직한’ 또는 ‘단순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마이어는 마치 우리의 ‘김’, ‘이’처럼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흔한 성 중의 하나라고 한다.
19세기 초 빈은 문화중심지로서 오스트리아, 독일, 프러시아, 그리고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을 포함한 주변국가들에 영향력을 미쳤다. 한편, 당시 신흥부유층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저택을 꾸미는데 새로운 양식의 가구에 대한 필요성이 커졌다. 다소 보수적이면서 튀지 않는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한 비데르마이어 양식은 기존의 앤틱 양식과는 달리 범국가적인 차원보다는 부유층들이 개인적으로 실내를 가꾸면서 발전된 양식이다. 음악, 의상, 실내장식을 비롯한 여가 및 취미와 관련된 산업이 각광받던 시기여서 가구산업 또한 이러한 트렌드와 어울리는 스타일로 발전되었다.
더불어 저택에 정원을 비롯한 자연을 담은 공간을 갖는 것이 유행하였다. 참고로, 이웃나라 독일과 북유럽의 비데르마이어 가구는 오스트리아에서 생산된 것에 비하여 훨씬 간소한 편이다. 또한, 마호가니 목재 사용과 더불어 영국의 레전시 영향을 받은 것이 나타난다.
비데르마이어 양식의 변천
비데르마이어 양식을 전문가들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1815년 이전의 엠파이어 양식의 연속적 시기, 번성기인 1815년에서 1830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로코코적인 성격을 지닌 1830년에서 1848년까지로 구분된다. 빈회의가 열렸던 1815년경 가구 및 디자인 분야도 전환의 시기를 맞았다. 그렇지만, 기존에 유행했던 건축적인 느낌이 드는 가구가 꾸준히 생산되었으며, 이집트의 스핑크스 장식 등은 <엠파이어 스타일>의 것을 사용하였다.
반면, 금장식이나 브론즈장식 등 화려한 금속장식은 이 시기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 1815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된 가구를 순수 비데르마이어 양식으로 칭한다. 가장 대표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프랑스 앤틱가구 중 샤를르 10세 양식과 다소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가구에 장식을 과감히 절제하고, 오로지 가구 표면의 나뭇결을 미적인 요소로 살려서 디자인했다. 간혹 흑단을 사용하여 가구의 실루엣을 강조하여 테두리 부분에 포인트를 주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1830년에서 1848년까지의 시기를 후기 비데르마이어 양식 또는 신로코코 양식으로 칭한다. 이 시기는 산업혁명이 막 도래하는 시기여서 신흥 부유층이 급성장하면서 다소 튀는 디자인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에 가구 디자이너들은 바로크적인 느낌이 드는 곡선 장식을 첨가하기도 하고, 거품 형태의 모티브를 고안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에 이어 빈 등지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망명하고, 혁명의 전면에 하층 시민이 부상하자 산업 시민층은 혁명에서 후퇴해 10월 말 반혁명의 승리로 끝나면서 비데르마이어 양식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신르네상스 양식, 또는 신고딕 양식 등 과거의 양식을 새로이 재해석한 가구가 그 뒤를 이었다.
비데르마이어 가구의 거장
비데르마이어 가구의 대표적인 생산지는 오스트리아의 빈과 독일의 베를린이다. 한편 뮌헨은 왕실의 취향을 고려해 신고전주의 가구의 생산을 이어갔다. 엠파이어 스타일의 경우 페르시에와 퐁텐느가 디자인을 완성하여 이를 보급하였던 것에 반하여, 비데르마이어는 다양한 가구디자이너들이 고객의 취향이나 자신의 스타일을 반영하여 디자인하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가구 디자이너로는 오스트리아의 조제프 단하우저(Josef Danhauser, 1780~1845)로 1804년에 아틀리에를 설립하였다. 그는 빈에서 가장 고객이 많았다. 그리고 고객들에게 폭넓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풍부한 카탈로그를 권했다고 한다. 베를린에서는 가구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카를르 프레드릭 싱켈(Karl Friedrich Schinkel, 1781~1841)이 활약했는데, 그는 기하학적인 성격이 강한 디자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기하학적인 라인과 대칭형 구조를 선호했던 비데르마이어 가구는 견고하여 오랫동안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호두나무, 단풍나무, 야생 벚나무, 자작나무, 물푸레나무를 주재료로 사용하였으며, 더불어 자국에서 생산되는 밝은 톤의 과실수를 소재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체리나무, 레몬나무, 배나무가 합판처럼 가구의 표면을 덮는 형태로 활용되었다. 이때, 가구의 표면을 균일하게 하고자, 합판장식은 가구 전체에 마치 커버를 덮듯이 제작하였다. 다소 고가였던 이 가공법은 훗날 표피를 더 얇게 절단하는 기술이 등장하면서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반면 엠파이어 양식의 가장 대표적인 목재인 마호가니 나무는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말엽부터 독일과 북유럽에서 다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앤틱 컬렉션
그렇다면 요즘 비데르마이어 가구를 찾는 컬렉터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실상 비데르마이어 가구는 한동안 잊혀져서 주춤했었다고 한다. 19세기 초반에 제작되었던 이 가구들은 꽤 한참 동안 인기를 얻지 못하다가 1980년대부터 컬렉터의 수가 부쩍 증가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에서의 가치도 함께 상승되었다. 기능성과 품질이 우수하면서도 가격경쟁력이 있어서 새로운 컬렉터 층이 형성되었다는 분석이다.
또한, 대부분 규모가 아담하고 작은 가구들이어서 아파트를 비롯한 요즘 실내구조에 적합한 것도 또 다른 장점이다. 소형 테이블, 의자, 실내에 화초를 장식할 수 있도록 고안된 가구들은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도 적합할 뿐 아니라, 요즘 생산되는 현대적인 디자인의 가구와도 잘 매치가 된다. 그래서인지 뉴욕에 주요 컬렉터가 많다고 한다.
글 | 이화행
아츠앤컬쳐 파리특파원, 파리 예술경영대 EAC 교수
소르본느대 미술사 졸업, EAC 예술경영 및 석사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