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츠앤컬쳐] 글이 손에 잡히지가 않아 배회한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듯. 원고 마감일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배회한다.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질풍노도와도 같은 변화들, 상처와 미안함, 머릿속에 가득한 전시기획일들, 학생들… 잠시 잠이 들었다. 전쟁터. 성안에 갇히어 쫓기고 방황한다. 이틀 전에는 역류에 휩쓸려 신 나게 쫓기었던 것 같다. 양재천으로 산책을 나갔다. 막 올라오기 시작한 누렇고 커다란 보름달이 시원하다. 달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오랜만에 청량한 공기가 상쾌하다. 보름달이 위로 오르면서 조금씩 하얘지고 작아져 간다. 그래도 맘이 잘 안 열린다. 최근 전시 테마인 캐릭터 에피소드1의 원성원 드로잉은 시크하다.
한 달 만에 재회한 우리는 여유롭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원성원 작가는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미술시장의 이야기들과 생각들을 나누었다. 전속 갤러리를 두고 안정되게 생활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그녀다. 그 소속에서 오는 안락함보다 치열한 자유를 갈구한다.
3년여를 함께했었던 프로젝트 808 레지던시 활동을 통해 컬렉터들과 투자 가치로의 미술을 넘어서 예술행위에 대한 담론, 왜 작가가 작업을하는지 그 작업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만들어 가는지를 토로한다. 왜 작가들이 소위 잘 나가는 그들이 가난한지, 작품은 어떻게 제작되는지, 작가들에게 진정으로 중요시되는 것은 무엇인지, 엘리트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음이 당연하기도 하다. 술도 함께하고 맹렬히 논쟁을 벌이기도 하면서 컬렉터들은 작가들의 생리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야생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 에피소드1 사진 작업에는 사람이 빠지고 동물들이 등장한다. 7살의 여자아이 이야기와는 다르게 쉽게 마음이 열리지가 않는다. 나를 섬뜩하게 만드는 것은 원성원의 드로잉이다. 아프다. 그로테스크하다. 동물을 등장시키어 의식적으로 정제되어진 사진 작업과는 달리 그녀의 무의식 세계를 고스란히 담은, 사람이 남아있고 직접화법을 사용하고 있는 드로잉 작업은 너무도 적나라하다. 탄탄한 스토리 라인을 형성하고 계획적으로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며 주도면밀하게 작업을 진행시키는 그녀의 사진 작업의 원류를 이루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 그 드로잉을 보다 취해서 잠이 들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진실들은 많은 부분이 미화되거나 왜곡된 허상일 수도 있다. 한순간 우리는 만나고 싶지 않은 동물들을 만나고 놀라고 당황한다. 그리고는 줄행랑을 침으로 상황에서 모면한다. 타협을 하고 적응하고 극복하고 단절하며 삶을 이끌어 간다. 우리에게 과연 안전한 공간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또 사람을 원한다. 상처와 혼란의 구렁텅이로 희망을 보며 나를 가다듬으며 또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딘다. 원성원은 에피소드1을 통해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살고 있는 ‘성격’의 섬이야기를 한다. 사람들 속에는 누구나 그 성격의 섬을 지니고 살고 있다.
가족에게 발휘되는 무거운 책임감. 정원이라는 공간 한 켠에만 쏠려버린 완벽함. 소박한 텃밭을 통해 드러내는 과시. 집에 대해 표류하는 집착.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날을 세우는 자존심 대결. -작가의 글
앙증맞은 듯 똘똘해 보이는 귀가 쫑긋 선 아기 승냥이와 검은 원숭이는 차가운 듯 푸른 숲 남자의 섬 앞에 존재한다. 남자의 성기는 곰을 상징하고 그 등 뒤로 자라난 남자의 탯줄은 매서운 이성의 날갯짓을 하는 욕망의 독수리와 피로 연결되어있다. 남자의 뒷목에서 자란 핏빛의 나뭇가지는 독수리의 날개를 뚫고, 퍼덕이는 독수리의 날개는 고요히 감은 남자의 눈을 살포시 덮고 있다.
새의 소리를 지닌 남자의 목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은 큰 강을 이루고 그의 섬에 젖줄이 된다. 푸르른 물이 흐르고 있는 남자의 가슴에는 따스하고 여유로운 사슴들이 노닐고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통통하게 물이 오른 기러기를 선물하려 한다. 땅에 발을 디디고 선 튼튼한 하체를 지닌여자의 무릎은 물에 담겨있고 내밀고 있는 팔의 어깨 뒤에는 새들이, 그녀의 왼쪽 엉덩이 붉은 털에서부터 자라난 길게 뻗은 선혈의 붉은 나뭇가지 위에도 새들이 노닐고 있다.
여자의 섬 끝 언저리의 얼룩말과 뿔을 가진 소는 남자의 몸집이 작은 승냥이 주변에서 풀을 뜯는다. 군데군데 선혈의 흔적이 있는 초록 숲 여자의 섬에는 목이 긴 기린과 쉬고 있는 사슴, 사냥에 나선 몸을 길게 늘어트린 살쾡이, 얼음 위에 서 있는 지친 펭귄과 호기심에 찬 염소가 살고 있다.
글 | 장신정
아트 컨설팅 & 전시기획. 국제공예트렌드페어 주제관, 큐레이터. 이천국제조각심포지엄, 수석 큐레이터. 홍익대학교 강사. NYU 예술경영/행정 석사. 전 MoMA P.S.1 전시팀장

